“딸랑딸랑, 미아리행 역마차요. 어서 타요. 전차보다 빨라요. 미아리까지 30전이오.”
“허허, 서울 장안에 버스가 없으니까 일제시대 때 다니던 역마차가 다시 나타나는구나.”
“할 수 있소? 사람은 많은데 전쟁통에 버스와 전차는 거의 다 망가지고 자동차라고는 씨알 하나 안 남았는데 역마차라도 다시 나온 게 다행이라 생각하고 타려면 잽싸게 타슈.”

“일본 놈들 때문에 발이 묶였던 역마차도 해방이 됐구나.”  


“통금시간 막차요. 얼른 얼른 타요, 이거 놓치면 유치장 신세요.” 
“아니 이게 무슨 마차야, 콩나물시루지, 좀 댕겨 서요, 발 좀 부칩시다. 12명 마차에 30명은 탔겠네.” 
“왠 놈의 미아리 고개는 이렇게 높은지, 말이 못 올라가네, 에이 참. 여보슈 젊은 남정네들은 내려서 마차 좀 밀어주우.”

“에잇 콩나물시루에 내 돈 주고 이게 웬 고생이냐!”  




해방 직후 임시로 교통난을 대처하기 위해 운행했던 역마차입니다. 해방직후 서울에는 95만명이 살았는데 해외에서 있던 동포들이 돌아와 120만명으로 늘어났죠. 거기에 전차 100대중 해방의 기쁨 때문이랄까 전차를 50대나 부셔버려 교통난에 허덕였습니다. 고물 목탄 버스는 도저히 못쓸지경이고 당시 미군 트럭은 그림의 떡이었죠.. 그래서 이걸 조금이나 해결하려고 군용 천막에 목재 차체로 만든 역마차를 운행했습니다.


당시 달리던 낭만의 초록 포장마차는 너무나 유명해서 유행가까지 만들어졌죠.


'해방된 역마차에 태극기를 날리며...'


당시 22살의 장세정이 부른 노래는 금세 전국에서 히트곡이 되었죠. 그 이후에는 작곡가 반야월이 만든 '초록포장 둘러치고 역마차는 달린다'라는 노래를 신카나리아가 불러 대히트를 했다고 합니다.


지금의 70-80대들이 이 노래만 나오면 따라 부르며 광복의 기쁨을 회상하곤 한다네요.


당시 총 200여대의 승합마차가 매일 서울 시내를 운행, 버스 역활을 했는데 신차는 30만원, 중고는 15만원에 말 한필도 2천원에 거래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쌀 한가마니가 120원 정도였으니 꽤나 비싼 가격이였죠.


이후 일본군 군용차나 미국제 군용차들이 풀리면서 자연스레 역마차는 퇴물이 되었고 1947년에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거기서 지금의 서울 시내버스를 보면 저절로 선조들의 피땀으로 이루어진 변화에 감사하고 존경심이 나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