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전후에는 전국에 흩어져 있던 운수업자나 장비업자들이 트럭,짚차,쓰리쿼터 등의
군수용품을 망치로 판금하여 버스나 트럭으로 개조시키는 자동차 재생 산업이 번창하였다.
요즘식으로 바꿔 말하면 '자동차 리모델링 산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당시 부산에서는 김창원,김재원 형제가 UNKRA계획에 의하여 1955년 2월 신진공업사를 설립하여
국내 최초 미니버스 모델인 H-SJ(25인승)을 2천대나 만들어 호황을 누렸으며, 이 버스가 서울에서
특유의 노란색 바디칼라로 운행되면서 당시 사람들에게는 '노랑차'라고 불리워지기도 했다.
 

 여기서부터 지금까지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는 대우버스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1960년도에는 현재의 전포동에 신진공업 부산공장이 준공 되었으며, 1962년 부평에 국내 최초의
대규모 자동차 조립공장(연간 생산능력 6천대)인 '새나라자동차(주)'가 닛산과 기술 제휴로
설립되었다.

 그 해 11월에는 대, 중형 자동차 조립공장 인가를 받았으며 우리 기술로 제작된
마이크로버스 차체는 덕수궁전시회에 출품하여 상공부 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당시, 신진부산버스 공장은 150명의 종업원으로서 3/4t 마이크로버스와 8t 대형버스(목재바디)를
생산하였다.
 1963년부터 미군으로부터 불하 받은 엔진, 미션, 액슬을 장착하고 자체 기술로 만든 차체로
FB100LK를 10여년간 2128대를 생산하였다.

 1964년도에 소형승용차 제조공장 허가를 취득하고 이듬해인

 1965년 새나라자동차를 인수하여 신진자동차공업(주)으로 개명하였으며 이어서 토요타와 기술 및 부품도입 계약을 맺고 새나라자동차 부평공장을 인수하였고 국내 대형버스 최초 모델인 B-FB-20을 생산하였다.

 1976년도에 종합 자동차 제조공장으로 허가를 받고 이때부터 서서히 대량생산 체계를 갖추게 된다.
명실상부한 종합자동차 메이커로 도약한 신진자동차에서 국영 한국기계공업을 인수하여 몸집을 불려갈 즈음에 부산공장에서는 DB102L이라는 9m급 버스를 개발하여 4년간 4049대를 생산하였다.
 1972년 그 당시 세계 최대 자동차메이커인 GM과 각각 2400만 달러를 투자하여 GM코리아(주)를 설립하였는데, 

이 때부터 신입사원을 공개적으로 채용하였으며

 그 시절에 입사하여 지금까지 대우버스의 역사와 함께하는 직원도 있고 자동차 공업의 선도적인 역할을 되새겨 자랑을 하기도 한다.
 이 시기에 다양한 버스가 개발되었으며 그 모델들은 대부분 토요타 엔진을 장착한 DHB400C, DAB등 9m급이었으나,

그 가운데에는 DB105라는 10m급 버스가 개발되기도 하였다. 1973년도에 GM코리아에서 개발한 대형승합차인 시보레버스(BD모델)을 발표하였고 이어서 시보레 라이트버스(중형승합)를 생산 개시하였다.
 1975년도에 국내 최초로 모노코크 타입의 리어엔진버스(엔진을 차량 뒤쪽에 장착)를 개발하였다.

당시 독일 MAN사 엔진이 전량 국내 모델로 교체되면서 개발된 BD101은 대우버스 역사상 길이 남는 BF101의 전신 모델이 된다.

 1976년도는 분주하였다. 대우에서 한국기계(주)를 인수하여 디젤 엔진 국산화를 착수하였고,

BD모델 버스는 4000대 생산물량을 돌파하였으며, BD101 리어엔진버스는 이집트로 수출된 국내 최초의 완성버스라는 경이로운 역사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 후, 회사는 상업은행과 GM이 지분을 각각 50%씩 출자하여 새한자동차로 출범하게 되었다.
 1977년도엔 버스의 국산화율이 90%를 돌파하였으며, 그즈음에 현재와 같은 부산공장과 동래공장의 형태로 운영하게 되었다. 또한 그 해 7월에는 대우그룹에 편입되었다. 그룹 편입 후인 1978년도에는 BD모델 생산 7000대를 돌파하였으며, 동년 7월에 김우중 회장이 대표이사로 취임하였다.

 또한 BF101 차종으로 시내 직행버스 발대식을 부산에서 가졌다. 이듬해인 1979년에는 제2차 석유파동이 시작되어 기준유가가 59%나 인상되었으며 박대통령 피격 사건으로 사회적인 커다란 관심속에 영결식용 영구차를 긴급히 제작하였는데,

 그 당시 대형 통유리와 특수시트 장착 및 차체를 100mm 낮추는, 그 당시 기술 수준으로는 구현하기 힘든 기술을 적용하여 업계의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1981년에는 고급 차종인 BV113 버스를 개발하였으며, 1983년 새한자동차(주)에서 대우자동차(주)로 상호를 변경하여 본격적인 고급버스 양산을 시작하였다.

 MAN사의 D2848(310ps)을 장착하여 국내 최고급버스인 BH120S는 국내 최초로 아연도금 강판을 적용하였으며 생산 1호차는 대우로얄즈 축구단에서 사용되었는데 회의실, 냉장고, 비디오가 장착된 특수 차량이었다. 이어서 BV113을 양산하기 시작하였다.

 1985년도에는 개발 후 꾸준히 생산된 BF101이 생산 3만대를 돌파하였으며, 단일 차종으로 국내 시장을 50% 점유하는 대기록을 달성 하였고 하루 버스 생산량 24대라는 진기록은 아직도 깨어지지 않고 있다.
 지금도 가끔, 그 때를 회상하며 향수에 젖어 자부심을 나누기도 한다. 그 시절 고객이 가졌던 당사의 높은 신뢰도가 지금까지도 '대우버스=신뢰'라는 강렬한 브랜드 이미지로 남아 있다. 그 해 3월, 대우그룹은 GM과 월드카 프로젝트에 합의하고 소형차 신규개발 및 생산라인 증설을 착수하게 되었다. 이런 여파 때문인지 대형버스에 대한 회사의 관심도가 점점 더 낮아져 갔다.
 1986년에 BS105 도시형버스와 BH115 고급관광버스를 개발하여 전차종의 라인업을 이루어 갔다. 1991년도에 BH120H 차종을 FACE LIFT하여 고객이 선호하는 BH120F를 양산했으며 1995년도에 BH117H, 1997년에 BH116H를 개발하여 틈새시장으로 파고들었다.

 특히 1996년에 개발 된 BM090은 도시형버스의 길이를 축소하여 경쟁사의 중형에 뒤늦게 대응한다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시내버스의 고객이 줄어드는 시장환경의 변화 및 운수업계의 운영비용 절감 정책과 일치하여 오늘날 주력 차종 중 하나로 변신하게 되었다.

 1995년에는 현재 중국 계림공장과 합작으로 중국에서 대형버스를 생산하였으며 1997년에는 관광업계의
어려운 현실을 감안하여 경제적인 BH115E를 개발하였다. 또한 BS120CN 초저상버스와 CNG를 사용하는 저공해버스를 개발하여 서울 대중교통 전시회에 출품하였으며 이어서 LPG 연료 버스를 개발하여 시범운행중이며 저상버스 상업용 출시와 더불어 버스분야에서 선두주자로 다시 한번 자리매김 하였다. 그러나 그룹사의 구조조정에 이어 1999년, 워크아웃이 결정되어 이듬해 2000년 11월 최종 부도사태와 포드사의 인수제안서 포기 및 2001년도 대폭적인 인력 감축안으로 장기간 부평공장은 생산중단이 이어졌지만 버스 공장만큼은 생산, 판매를 더욱더 강화해 나갔다.

 당시 버스공장은 본격적인 CNG버스 양산체제를 갖추었으며, 수출 주력차종인 BF106을 출시하였다. 또한 이 때무터 본격적으로 초저상버스 양산을 위한 투자를 하게 된다. 2001년 5월 GM사의 인수방침에서, 상용부문의 인수가 제외되게 되어 버스공장은 독자 회생을 모색하게 되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버스공장 직원들의 노력과 이어지는 수출물량에 의하여 공장의 정상화는 지속적으로 유지되었고 경영에 대한 밝은 미래를 보임으로서 사업다각화에 초점을 맞추어 최초 인수의향을 제시한 영안과 조우하게 되었다.

내용출처 : [기타] 대우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