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씨개명을 단순히 '일본식 이름 짓기' 로 아시는 분들이 많은데, 사실 그 일본식 이름도 마음대로 지으면 안 되었습니다. 안 보이는 가이드라인이 분명 있었던 거죠.
천황족 다 죽어라' 같은 '창의적인' 이름들은 당연히 금지되었고, 일본어 조어법에 대놓고 어긋나는 이름(요즘으로 치자면 소위 DQN네임)도 반려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성인 씨(氏)를 만들 땐 중요한 원칙이 있는데, 바로 일본인들의 성과 확실히 구별되는 것으로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장 조선총독부가 펴낸 창씨개명 가이드북엔 이런 언급이 있습니다.
"신문, 라디오, 팸플릿, 강연, 정신총동원을 통해 내지인 식의 씨, 즉 두 글자의 씨를 마련할 수 있는데 이는 일본 기존의 씨를 따라 쓴다는 취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본에서의 성씨는 지명을 취해 온 것이기 때문에 이 것
을 따를 것을 철저히 주지해야 합니다.
새롭게 씨를 만드는 데에는 이제까지의 성과는 완전히 다르게 하는 것이 올바릅니다. 그리고 각기 집안과 관계있는 지명을 고르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竹添町(타케조에초)에 살고 있는 자가 타케조에(竹添)씨,
和泉町(이즈미초)에 살고 있는 자가 이즈미(和泉)씨,
三角地(삼각지)에 살고 있는 자가 미스미(三角)씨,
松月町(마츠즈키초)에 살고 있는 자가 마츠즈키(松月)씨를 칭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방식입니다.
이유없이 황국인(일본인)의 씨를 흉내내어 사토(佐藤), 고미(五味), 이노우에(井上), 호리우치(堀內) 등으로 칭하는 것은 가장 우스운 일입니다.
성 외에 따로 집의 명칭을 나타내고 일본 식의 씨, 예를 들면 김씨 성을 칭하는 집이라면 이것과 관계가 있는 카네코(金子)라든지 카나이(金井)라든지 종래의 성을 이용해 씨를 붙이게 하려는 것입니다."
또한 일본 법무국도 의회 보고에서 조선 창씨개명을 설명할 때 이런 자료를 제출했습니다.
"되도록 성, 본관, 주소 등에 연유한 씨를 설정하도록 지도하면서 (일본인의) 씨가 가지는 존엄성을 모독하지 않게 하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던 것인데 지금 설정된 씨를 보면 그 지도 방침에 잘 따라서 황국신민으로서 적절한 씨를 설정하고 있다.
즉 그 종류는 지금 열심히 조사 중이며 정확한 숫자는 판명되지 않지만 수만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며 종래 250여 개의 성이었을 때보다 동성동명의 불편은 일소되어 집의 칭호로서의 사명을 잘 완수하고, 또 씨의 명칭에 대하여도 본부(총독부)의 지도 방침에 따라서 카네모토 (金本), 야나야마(梁山), 히라야마(平山) 등 성 또는 본관 등에 연유된 것을 정하고 있어 내지인의 성씨를 혼란하게 한다는 비난은 기우에 지나지 않음을 입증했던 것이다."
즉 창씨개명은 일본식 이름을 얻음에도, 그 일본식 이름은 무조건 '조선인 티가 나게' 지으라는 겁니다.
지금 우리나라로 비유하자면 베트남의 응우옌(阮)씨가 결혼 등으로 한국 국적을 얻었을 때 무조건 응우옌을 한국식으로 읽은 '완'씨를 쓰라는 식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완씨는 기존 한국에는 아예 없는 성이기에, 만약 완씨 성을 쓰는 사람이면 무조건 베트남 출신이라는 게 티가 나겠죠? 딱 그런 겁니다.
이렇게 창씨개명 자체가 일본인과 조선인을 완전히 동일하게 한다는 '내선일체' 는 커녕, 오히려 차별성을 더 강화하는 꼴이나 다름없게 돌아갔던 겁니다. 물론 일본은 성이 워낙 많은 나라라 이렇게 창씨로 만든 조선식 일본 성씨도 기존 일본 성씨와 겹치는 것도 적지 않지만, 그래도 이 성을 들은 사람이 의심 정도는 해볼 여지는 충분히 줬던 겁니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차별을 더욱 강화시킬 여지도 있었어요.
일제가 창씨를 내걸고 몇년 지나지 않아 패망해 이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내리긴 힘들지만, 만약 일제 지배가 좀 더 이어졌다면 이에 대한 문제도 분명 생겼을 겁니다.
출처: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일제 식민지 시대 새로 읽기', 혜안,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