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훈아씨, 역시 대단하십니다. 포스트 상세 정보 2008-01-25 19:09:30 조회 (104284) | 추천 (4) hjh1103 liberum seeking rachel0303 [본문] 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나훈아씨가 기자회견을 하셨습니다. 네티즌의 반응도 극과 극이지만, 이걸로 인해 나훈아씨는 팬이 훨씬 늘었을 것 같습니다. "카리스마 짱이다" "멋지다"는 반응이 많군요. 특히 바지 지퍼 퍼포먼스는 정말 최강이었습니다. TV로 생중계되고 있는 상황에서 당장이라도 바지를 까 뒤집을 태세로 "자, 보여줘야 믿을래, 그냥 믿을래"라고 말하는 장면에서의 포스란... 감히 상대할 사람이 없겠더군요. 25일 나훈아씨의 기자회견 소식을 듣고, 나훈아씨가 30여년 동안 몰고 다닌 화제들이 잠시 머리를 스쳐갔습니다. 어지간히 화제를 많이 뿌린 분이죠. 이 이야기를 기사로 만들어 보려고 왕년에 연예기자로 활동하신 대선배들에게 문의를 했지만, 다들 '바쁘다' '입장이 좀 그렇다'며 직접 쓰시지는 않겠다고 하시더군요. 결국 "얘기는 해 줄테니 직접 쓰라"는 쪽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그게 이 기사입니다. 풍운아 나훈아, 끝없는 화제의 연속 70년대 남진과 함께 최고의 인기가수로 군림했던 나훈아는 데뷔부터 현재까지 끊임없는 화제를 양산했다. 언제나 대중의 가장 뜨거운 관심 위에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나훈아는 인기 절정이던 1976년, 당대 최고의 여배우이자 11세 연상인 김지미와 동거에 들어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이들은 공개 결혼식을 올리지 않은 채 혼인신고를 하고 김지미의 친정이 있던 충남 신탄진(현 대전)에 신접 살림을 차렸다. 김지미에겐 홍성기 감독, 영화배우 최무룡에 이은 세번째 결혼이었고 나훈아는 재혼. 이후 6년만인 1982년 결별을 맞은 이들의 소감은 "(기왕 불화설이)소문난 김에 헤어진다"는 것이었다. 이 말은 김지미가 최무룡과 이혼할 때 했던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소감과 대조를 이뤄 한동안 인구에 회자됐다. 하지만 결별 후에도 김지미는 사석에서 나훈아를 한번도 나쁘게 얘기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김지미는 "나훈아만큼 남자다운 사람도 없었다. 나이 차이가 꽤 났지만 남편으로서 의지할만한 남자였다"고 술회했다. 당시 나훈아는 6년간 같이 살면서 김지미의 재산도 함께 관리했지만 이혼 당시 재산 분할에 대한 아무런 요구 없이 맨 몸으로 나왔다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이유를 묻는 지인들에게 "남자는 돈이 없어도 살지만 여자가 돈이 없으면 살기 힘들다"고 대답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를 접했던 후배들이 한결같이 "그만큼 카리스마로 상대를 압도하는 선배가 없었다"고 말한 데서도 '남자다움'은 쉽게 느낄 수 있다. 김지미와 결별한지 1년만인 1983년, 나훈아는 '아빠가 됐다'는 충격적인 보도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현역 기자 시절 이 사건을 보도한 영화평론가 김두호씨(전 굿데이신문 편집국장)는 "당시 이 소식을 듣고 산모가 산다는 내발산동 일대의 산부인과를 모두 뒤져 산모와 아기를 찾아냈다"고 회고했다. 나훈아의 아들을 낳은 주인공은 후배 여가수 정수경. 이들은 1985년 결혼식을 올렸고 현재까지 부부로 살고 있다. 현재 정씨는 아들과 함께 미국 뉴욕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나훈아 피습사건' 또한 올드 팬들의 기억에 아직 생생하다. 1972년 6월, 서울 시민회관에서 공연중이던 나훈아가 '찻집의 고독'을 부르고 있을 때 한 남자가 무대 위로 갑자기 올라섰다. 술에 취한 것으로 보이던 이 남자는 사람들이 제지할 틈도 주지 않고 손에 들고 있던 깨진 사이다 병을 휘둘러 나훈아의 왼쪽 뺨에 깊은 상처를 냈다. 김아무개씨로 밝혀진 이 남자는 남진의 열성 팬이었고, 체포 직후에도 "남진의 사주를 받았다"고 횡설수설해 파장은 끝도 없이 치달았다. 결국 남진의 결백이 밝혀진 것은 3년뒤. 나훈아를 폭행했던 김모씨는 1975년 11월 남진에게도 폭행을 가했다.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았지만 이번에도 김모씨는 횡설수설로 일관, 남진이 나훈아 폭행과 무관함을 증명해줬다. 남진과 나훈아의 뜨거운 라이벌 관계가 낳은 삽화였다. 나훈아는 1984년, 조용필에 이어 일본에 진출해 뜨거운 성원을 얻기도 했다. 일본 데이지쿠 레코드와 계약한 나훈아는 첫 일본 방문 때 음반사의 전 직원이 나훈아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환영 행사를 준비했을 정도로 열풍을 일으켰다. 당시 이 광경을 지켜본 관계자들은 "당시 나훈아가 일본 활동에 주력했다면 조용필에 이어 원조 한류 가수로 큰 족적을 남겼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70년대 전성기를 누린 나훈아는 80년대 이후에도 '갈무리' '잡초' 등의 히트곡을 낳으며 승승장구, 30여년에 걸친 스타덤을 이어갔지만 대중 앞에서의 노출은 점점 적어졌다. 인터뷰도 거의 없었다. 결국 나훈아를 둘러싸고 최근의 괴소문이 퍼진 데에는 지나치게 대중의 관심을 외면한 신비주의도 한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끝) '나훈아'라는 스타의 무게는 이런 분들의 존재로 증명됩니다. 공식 이미테이션 가수 나운하씨입니다. 라이벌 너훈아씨도 있죠. 이런 분들이 활동할 정도로 대단한 스타인 걸 모르는 분들은 없겠죠. 하지만 이날 기자회견엔 좀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기자회견은 글자 그대로 질문과 응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나훈아씨는 자기 혼자 얘기하고 '회견'을 끝내 버렸습니다. 혼자만 말하는 건 회견이 아니죠. 게다가 나훈아씨는 "오늘 나는 내키는대로 얘기하기 위해 아무런 준비도 안 하고 나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웬걸, 두 시간 동안 잘 짜여진 '나훈아 쇼' 한편을 본 느낌입니다. 너무나 잘 준비된, 그리고 너무나 잘 연출된(바지 지퍼 퍼포먼스가 절정이었죠) 공연 말입니다. 모든 책임을 '언론'에 돌린 것도 사실 불만스럽습니다. 언론이 정말 나훈아씨의 '한마디'를 필요로 할 때 그분은 침묵해서 의혹을 부추겼습니다. 막상 세종문화회관 대관이 취소되어 "나훈아 왜?"라는 기사가 나왔을 때, 그분과 그분의 소속사 아라기획은 뭘 하고 있었습니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고 전화통화조차 되질 않았습니다. 대체 소속사란 뭘 하는 곳입니까. 나훈아씨는 이날 "이 회사는 내가 일하지 않을 때는 문을 닫는 회사"라고 하더군요. 그럼 소속사의 문을 닫아 놓고 나훈아씨의 안부를 어디에 확인하란 말입니까? 이건 기자들이 부지런하지 않아서 생긴 일은 절대 아니라는 걸 잘 아실텐데 말입니다. (오늘 가장 멋진 말은 이거였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안 썼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방관잡니다.' 루머와 관련된 기사를 쓴 사람은 물론, 쓰지 않은 사람도 루머가 이렇게 퍼진 데 책임이 있다는 주장입니다. 역시 멋진 수사법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기자란 것들은 다 책임이 있다'는 말이 되죠.) 아무튼 이날의 굉장한 박력 연출로 인해 나훈아씨는 건재 이상을 증명했습니다. 올해 만 61세, 정말 대단한 기백입니다. 이날 기사에 달린 네티즌 댓글 중에는 "태왕사신기에 왜 나훈아씨를 캐스팅하지 않았냐. 배용준보다 훨씬 카리스마가 넘친다. 정말 광개토대왕의 포스가 풍긴다"는 것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하하. 사투리만 좀 다듬으면 충분히 왕 역도 하실만한 분이죠. 그나자나 이렇게만 회견을 끝냈으니 대체 언제쯤 현역으로 복귀하신단 말입니까. 그거 참... 왠지 이렇게 씩 웃으면서 "그것도 니들이 잘 알아 봐"라고 하실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