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펌임다^^ ------------------------------------------------------ 이 글을 쓰신 분은 홍동원님 입니다. 홍익대학교와 같은 학교 대학원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하고, 2년간 독일 에센에서 디자인 공부를 했다. 조선일보 섹션 신문 <굿모닝 디지틀>과 <국민일보>, <스포츠투데이>, <파이넨셜뉴스>의 신문 편집 디자인을 했다. 현재 글씨미디어 디자인실장이다. 지난 해 ‘분홍개구리’라는 출판사를 설립, 신화 시리즈 <인챈티드 월드>를 발간했다. ------------------------------------------------------------------------ 교통관리안전공단에서 나온 사람이 설명했다. “일 년여간 자동차 번호판에 대한 연구를 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나라 자동차와 어울리는 번호판의 색깔은 무채색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래서 번호판의 바탕은 흰색, 글자는 검은색으로 하고 명도차를 최대로 크게 해 글자를 잘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회의는 한없이 늘어져 30분 넘게 자신들이 번호판에 대한 연구를 얼마나 충실히 했는가를 설명했다. 그런데 그 연구 결과에 따라 번호판을 만들어 조사를 해보니 장의사 번호판이라는 반응이 나와서 난감하다고 말을 맺었다. 다음은 건설교통부 자동차 번호판 담당자의 말이 이어졌다. 정부에서 시행하는 일은 업체의 규모가 정해져 있다. 대기업에 발주하는 일이 있고, 중소기업에 발주하는 일, 그리고 영세 기업에 발주하는 일이 정해져 있다고 했다. 자동차 번호판은 전국의 102개 영세 기업들에 발주하는 일이란다. 다시 말하면 자동차 번호판을 만드는 기술은 그 102개 영세 기업이 갖추고 있는 제작 사향에 맞추어 디자인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30년 만에 바뀌는 자동차 번호 체제에 맞추어 자동차 번호판을 디자인했다고 언론에서 본 지 일 년 만인 어느 날, 나는 자동차 번호판의 디자인 자문위원으로 불려갔다. 뺀질뺀질한 디자이너들은 다 도망가고 나같이 얼빵한 전문가 두 명이 이 엔테베 작전에 간택됐다. 아! 어떡하면 이 망가진 일에서 도망갈 수 있을까. 나는 잔대가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결국 서너 시간의 난상토론 끝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디자이너의 임무가 주어졌다. 시간 다 쓰고 예산 다 써버린 자동차 번호판 일을 아주 짧은 기간에, 게다가 무료로 고쳐야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역사적 사명만이 남았다. 번호판의 재질을 바꿀 수 있습니까? 안됩니다. 색깔을 바꿀 수 있습니까? 안됩니다. 홍 실장은 글자만 새로 써주십니다. 나머지 한 분이 색을 담당할 겁니다. 그리고 그 외에 모든 것은 이미 결정되었기 때문에 절대로 바꿀 수 없습니다. 어차피 불려왔으니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번호판의 숫자만, 정말로 숫자만 다시 정리해주겠노라고 말하면서 적어도 이 일에서 한 발만이라도 빼고 가야지 하는 생각으로 이 폭탄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런 일들은 뻔한 수순을 밟는다. 처음에는 자문위원으로 위촉을 하고 간단한 조언을 듣겠다고 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자문회의에 참석하는 순간 이미 물린 것이다. 처음에 간단하다고 시작한 설명은 분명 빙산의 일각이다. 어김없이 이 일도 줄줄이 사탕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왔다. 버틸 대로 버텨보지만 그들의 읍소를 거부하지 못하고 결국 나는 두 발 다 담근다. 그것도 모자라 온몸을 다 던져야 회의가 끝난다. 이 회의는 애초에 철저히 각본이 짜이고 기획된 것이 분명하다. 이 회의는 어떤 면으로 보면 납치, 공갈, 협박이다. 그러니까 정신 좀 차리고 이 자동차 번호판 일이 어떻게 나한테 온 것이고, 내가 해야 될 일은 무엇인가 정리 좀 해보자. 자가용 번호판은 2종이란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 자동차 회사에서 만들어낸 차들의 번호판을 다는 자리의 규격이 새로 만든 번호판 크기와는 달라 한 10년 정도는 새로운 크기로 만든 디자인과 기존의 크기로 만든 디자인을 혼용해서 써야 하기 때문. 그리고 영업용 번호판, 대형 트럭 그리고 버스 번호판까지 모두 6종이란다. 그 말끝에 그들은 배시시 웃으면서 임시 번호판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추가 옵션도 있다. 번호판 제작업체가 영세하기 때문에, 금형에 대한 아주 특별한(?) 주문이었다. 디자이너에게는 쥐약 같은 옵션이었다. 번호판 가장자리에 테를 두른 이유는 제작상 그렇게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번호판은 기본적으로 소부도장이라고 했다. 칠하고 불에 굽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분사 방식이 아니라 롤러 방식으로 한단다. 분사 방식은 표면이 고르며 매끄럽고 롤러 방식은 롤러의 줄무늬가 쭉쭉 간다. 그러니까 철판에 흰 칠을 하고 요철을 주면 튀어나온 숫자 형태에 롤러가 지나가면서 색을 입히는데, 이때 철판이 휘지 말라고 가장자리로 요철을 준 부분에도 색이 칠해지는 것이고, 이것이 결정적으로 장의사 차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공정을 하나도 바꿀 수 없단다. 공정을 바꿔서 고시를 하면 특혜시비가 일어난다고 한다. 어느 한 업체에 일을 몰아주려고 공정을 바꿨다고 번호판 만드는 업체들이 아우성을 친단다. 그럼 언론은 그걸 뻥튀겨 ‘아니면 말고’ 식의 직격탄을 쏴댄다고 한다. 그러니까 가장 싼 방법으로 영세한 업체들이 현재 보유한 기술로 제작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에 추가로 하나 더. 숫자를 디자인할 때 위변조를 못하게 해야 한다는 조항이다. 예를 들면 1자는 7자로 못 만들게, 그리고 3자는 8자로 변형을 못하게 이리저리 틀어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우리나라 영세 업체들이 30년 전의 금형기술로 손쉽게 만들 수 있는 디자인을 요구하는 마당에 번호판 하나 만드는 게 뭐가 어렵다고 숫자를 대충 칠해서 변조를 하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해야 하는 디자인은 30년 전 금형기술을 이용한 시간도 돈도 다 떨어진 땜빵용 일이다. 그것도 지금 언론에서 지지리 욕을 먹고 있는 실패작을 고치는 일이다. 며칠 전 영국을 여행하고 돌아온 선배가 찍어 온 사진을 볼 기회가 있었다. 자동차들이 서 있는 거리 사진에 시선이 꽂혔다. 노란 바탕에 검정 글자, 그리고 새로운 재질. 선배는 영국이 얼마 전에 자동차 번호판을 새로 디자인했다고 말했다. 아! 영국을 21세기 디자인 선진국으로 만든 토니 블레어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