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민항기 불시착 사건(中國民航機不時着事件)은 1983년 5월 5일 오후 2시, 춘천의 미군 헬기 비행장인 '캠프 페이지'(CAMP PAGE)에 승객 96명(납치범 6명 제외), 승무원 9명을 태운 ‘중국민용항공총국'(중국민항) 소속 여객기 한 대가 불시착한 사건을 말한다. 중화인민공화국 본토를 출발한 비행기가 대한민국에 착륙하기는, 1949년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처음이었다. 당시에는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 미수교 상태였기 때문에 외교적, 정치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이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간의 한국 전쟁 이후, 첫 번째 공식외교접촉이 성사되었다


사건개요: 

이 여객기는 5월 5일 오전 11시(한국 시각) 랴오닝 성 선양의 선양동탑공항(瀋陽東塔空港)을 떠나 상하이 훙차오 국제공항으로 가던 중이었다. 탁장인(卓章仁) 등 6명의 납치범들은 기내를 무력으로 장악하고 기수를 대한민국으로 돌릴 것을 요구하였다. 승무원이 거부 의사를 밝히자, 무장 납치범들은 총격을 가하였다. 이로 인해 승무원 2명이 부상당한채 춘천 '캠프 페이지'(CAMP PAGE) 주한 미합중국 육군 항공 기지에 불시착했다. 납치범들은 중화민국 대사 면담과 중화민국으로의 정치적 망명 허용을 요청하였다. 이 때, 대한민국 정부는 요구 조건을 수용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고, 결국 무장납치범들은 무장을 해제했다.

이 사건의 해결을 위해 중국 정부는 기존의 소극적이고 제한적인 접촉에서 직접적인 교섭으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에는 한중 직접교섭을 위한 미국과 일본의 지원과 알선이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초기 간접교섭방법을 통해 항공기와 승무원의 송환을 협상하려 했으나 사건 발생 3일만에 중국민항총국장 심도(沈圖) 및 33명의 관리와 승무원이 직접 서울을 방문하여 당시 공로명 외무부차관보와 직접 협상을 벌였다. 9개 항에 걸친 외교각서가 서명되었으며 처음으로 "중화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이라는 양국의 정식국호가 사용되었다. 양국은 납치범을 대한민국 법에 의해 재판할 것과 향후 유사한 사건이 발생될 때 긴밀히 협조할 것을 합의했다.


납치범과 탑승객: 

1983년 5월 5일 21시, 승객과 승무원들은 비행기에서 내려 춘천에서 1박 후 서울로 이동했다. 납치범들은 별도로 수용됐다. 대한민국 정부는 승객과 승무원들을 최고급 워커힐 호텔에 투숙시킨 뒤, 여의도와 자연농원 관광을 시켜주었고, 출국 시에 컬러 TV를 선물하는 등 한중관계개선의 지렛대 역할로 이 사건을 활용하려고 노력했다. 납치범 6명은 1년 간의 구속 수감 후, 추방형식으로 중화민국으로의 정치적 망명을 허용하였다.


사건의 영향: 

1983년 8월, 중화인민공화국 민항기가 대한민국의 비행정보구역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하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또한, 체육, 문화, 관광 등의 비정치적인 영역에서 대한민국-중화인민공화국 간의 교류를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7] 공식 외교 접촉의 영향을 받아, 1984년 2월에 열린 데이비스컵 테니스 대회에 대한민국 선수가 최초로 참가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1984년 3월, 친척 상호 교류를 허용하였고, 이로써, 1984년 4월, 중화인민공화국 농구 선수단이 최초로 대한민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전반적인 대한민국 - 중화인민공화국 간의 관계가 호전돼 1992년 수교로까지 이어졌다. (출처: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