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94번_제보

  나는 여태껏 내가 현역으로 복무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아니,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했다. 그래야 내가 국가의 노예로 헌신한 20개월 남짓한 시간이 의미있게 느껴질 수 있었으니까. 정말 가고 싶지 않았던 군대이지만, 어짜피 복무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래도 몸 성하고 정신 멀쩡한 사람이 국경선을 지키고 있는게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했다. 국가를 지킨다는 생각보다도, 낮은 콘크리트 판 하나 사이에 두고 언제든 넘어올 수 있는 미치광이 빨갱이들로부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고 있다는 생각으로 자유를 박탈당한 채 1년 8개월 남짓한 시간을 버텼다. 우리는 혹시라도 처들어올 지도 모를 그들을 저지하기 위해 매일 훈련받았고, 동료들이 벙커에 박혀서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것을 보았다. 훈련을 받고 나면 항상 부상자가 많았고, 나도 훈련을 받다가 발목 인대가 파열되어 평생 보호대를 차고 다녀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렇게 훈련을 받고 나서 밥을 먹기 위해 간 식당에 켜진 뉴스화면에서는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나와 북괴를 옹호했고, 통일부 장관이라는 작자는 자기가 어디 서있을지도 몰라 주무관 따위의 지시를 받으며 사진 찍히는 것에 열중했고, 여당 당대표라는 사람은 버스에서 벨트 하나 스스로 못매고, 그렇게나 강조했지만 기어코 유엔사 규정 어기고 북괴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 뒤에는 항상 만일을 대비해 훈련하고 밤을 지새며 근무하고 있는, 그리고 그들이 방문한다는 소식에 개인 정비시간까지 희생하며 경호 및 의전을 준비한 사병과 간부들이 있었고, 천한 면상에 어울리지 않는 양복을 입고 지방덩어리 몸을 휘적휘적거리며 허허 웃는 것만 할 줄 아는 작자들은 사진이 찍힌 후에 아무말 없이 사라지곤 했다. 그런 작자들을 매일 보면서도 딱 한 생각으로 버텼다. 나는 자랑스러운 경비대원이다. 모든 사람들 앞에 우리가 있다. 무너지지 말자. 역겨워도 참자. 


 하지만 나는 오늘 국방부의 발표를 듣고 내가 대한민국 군대에서 복무한 것이 너무나도 부끄러워졌다. 대한민국은 검찰을 정부의 수하인으로 개조하려는 한 무법주의자를 보호하려 현역 60만 장병과, 수많은 예비역과, 그들의 부모, 형제들을 능욕했다. 군은, 특히 대한민국의 안보적 상황 때문에 지난 60여년간 오로지 남성에게만 2년에 가까운 시간을 헌납라는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하는 대한민국 군대는, 반드시 흔들리지 않는 규정과 정의와 원칙으로 구동되어야 한다. 그것이 한 국가를 수호하는 집단이 명예를 걸고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양심이자 그것을 하기 위해 지금껏 희생만을 강요당한 국민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약속이다. 헌데 오늘 대한민국 군대는 자신들의 최소한의 양심과 약속을 저버리고 정부의 개로 전락했다. 인간이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를 박탈하고 마치 선심 베풀 듯이 부여하던 휴가라는 것이 죽어라 훈련받아야 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정당한 문서를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버려가며 승인 해달라고 애원해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힘 좋은 부모의 전화통화와 그것을 들은 지휘관의 구두명령으로 승인될 수 있는 것임을 알고 나서 내가 처음 느낀 감정은 분노도, 허무함도 아닌 부끄러움이었다. 나는 괜히 멍청하게 편법 안쓰고 현역을 복무한 내가 부끄러웠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만 했던 순간들이 치욕스러웠고, 전화 한통이면 될 휴가를 따기 위해 아등바등 힘썼던 순간들에 화가 났다. 


 나는 뉴스를 보고, 자랑스럽게 방 한쪽에 걸어두었던 판문점 헌병 완장과 오른쪽 가슴에 항상 매달려 있던 게스트 뱃지와 예비역 마크를 달고 있던 군복들을 모두 창고에 넣었다. 그리고 여전히 걷기만 하면 퉁퉁붓는 발목을 부여잡고 나 자신을 안쓰러워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엄마가 법무장관이 아니고 아빠가 민정수석이 아니어서라고,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