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전 교수는 경제학자답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경제학적으로 풀려 한다. 그래서 공창제와 일본군 위안소 제도의 연속선상에서 연구한 선행연구를 저자의 주장으로 끌어들였다. 먼저 이 전 교수는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가 주도하는 낙성대경제연구소 팀이 번역·해설한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를 근거로 제시한다. 박치근이라는 조선인이면서 일본군 위안소 관리자였던 사람의 일기에선 1943년 2월에 버마의 위안소에서 번 3만2천원을 고향으로 송금하려는 대목이 등장한다. 이를 두고 이 전 교수는 “오늘날의 가치로 1억엔, 한화로 10억원에 달하는 거액”이라며 “6개월 만에 그 정도를 번 것”이라고 평가한다. 또 박치근이 자신이 관리하던 ‘위안부’가 모은 돈 1만1천원(현재 가치 약 3억5천만원)을 본국으로 대신 송금해준 일기의 대목을 인용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던 문옥주 할머니의 저축액도 주로 인용하는 자료다. 그는 문옥주 할머니가 1945년 9월까지 약 2년 동안 2만6551원(현재 가치 약 8억3천만원)을 저금한 장부를 인용한다. 한마디로 일본군 위안소 운영자나 ‘위안부’나 엄청나게 돈벌이가 좋은 일자리였다는 이야기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고 나면 ‘위안부’ 피해자들을 지지하는 사람이라도 ‘정말?’ 하고 자신의 판단이 흔들리는 느낌이 들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자료는 일본 우익들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단지 공창(매춘부)에 지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근거로 쓰이는 단골 메뉴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일본의 양심적인 지식인과 시민들이 운영하는 ‘일본 전쟁 책임 자료 센터’와 ‘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 리서치 액션 센터’는 이런 우익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이들이 한국어와 일본어로 제공하는 누리집에 게시한 “문옥주 할머니는 버마에서 부자가 되었다?”라는 제목의 글을 보자. “문옥주 할머니가 2만엔 이상 저금했다고 하는데 그 내역을 보면 1945년 4월에 1만560엔, 1945년 5월에 1만엔 등 대부분이 1945년에 집중되어 있다. 패전 때 도쿄의 물가가 1.5배 상승에 머물렀던 것에 비해 버마는 1800배, 즉 도쿄에 비해 1200배의 인플레였다. 

그러니까 버마에서 모은 2만 몇천엔은 그 1200분의 1, 즉 20엔 정도의 가치밖에 없었다. 게다가 버마는 일본의 점령지 중에서도 가장 인플레가 심한 지역이다.” 그러니까 당시 문옥주의 저금액은 20엔 정도의 가치였다는 것이다. 

2007년 한국 정부가 군인 군속 공탁금과 관련해서 1엔당 2천원으로 환산해서 위로금을 지급한 적이 있다. 이 비율을 적용해보면, 문옥주 저축액은 지금 가치론 4천엔, 즉 고작 4만원 정도밖에 안 된다. 

처음엔 점령지의 통화가 엔과 등가로 설정됐지만, 버마 등 동남아 지역에서 인플레가 심해지자 일본 정부는 환전 차액을 실현하는 것을 막기 위해 1945년 외자금고를 설립했다. 버마에서 저금해 많은 돈을 모았다고 하더라도 일본의 엔으로 교환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피해자들이 위안소에서 업자나 군인들에게 돈을 받았냐 안 받았냐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일본군 ‘위안소’ 제도를 누가 만들고 어떻게 운영했는가다. 우리가 일본 정부에 책임을 물을 때 관건이 되는 지점이다.


이 문제에 대해 이 전 교수는 위의 주장들을 근거로 궁극적으로 본군 ‘위안부’가 ‘고수익을 기대하고 온 개인 영업자’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는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여자정신근로대(정신대)와 ‘위안부’를 혼동해서 사용해온 점도 강력히 비판한다. 정신대는 근로동원 대상이지 군 ‘위안부’가 아니었는데도 같은 것처럼 써왔다는 지적이다. 또한 그는 ‘여자정신근로령’이 일본과 달리 “조선에서 실행되지 않았”고 “그럴 만한 여건이 못 되었”다고 말한다. 다만 관의 권유와 알선으로 접객업 여성이나 여학생이 정신대로 조직되어, 두어달 국내의 군수공장에서 일한 사례가 있었고, 2천명가량이 일본 군수공장으로 건너갔을 것이라는 짐작을 덧붙인다.


이 전 교수의 주장은 일부는 타당하나, 일부는 오류이고, 일부는 아직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 역사학에서 연구가 일천한 분야인 탓에 한국 사회와 관련 단체가 이 문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황에서 용어를 잘못 사용한 것은 맞고, 현재는 많은 부분 바로잡혔다. 


하지만 일본과 마찬가지로 조선에서도 ‘여자정신근로령’이 시행된 것이 맞다. 다만 조선에는 여자정신근로령 대상자가 극히 적었다. ‘14살부터 25살의 무직이고 학교에 재학하지 않은 미혼 여성’에 ‘동창회나 학교 단위로 결성하라’는 등의 조건에 부합하는 여성이 적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전 교수의 말대로 조선에서는 “관의 지도 주선” 방식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동원하는 과정에서 많은 파행이 나타났던 것이다. 조선인 여성이 정신대로 동원됐지만, 일본의 군수공장에 가지 않고 위안소로 간 사례가 존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이 일본과 결코 동등하지 않은 식민지였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 전 교수는 영화 <귀향>에서 일본군 헌병이 소녀를 끌고 가는 장면이나, 조정래 소설 <아리랑>에서 위안부를 징발해 가는 대목을 두고 “더러운 종족주의의 표본”이라고 분노를 표한다. 물론, 일본 군인이 총검을 앞세워 조선인 처녀들을 끌고 가는 모습이 보편적이었던 것처럼 인식된 건 지나쳤다. 이런 허점을 이용해서 아베 신조 총리와 일본 우익이 ‘위안부’ 강제 연행을 증명하는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고, 일본 정부는 책임이 없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은 분명히 있었다. 물론 점령지나 특히 전시 지역처럼 군인이 전면에 나서서 사람들을 끌고 가는 형태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식민지 조선에서 공창제와 소개업이 법으로 실시되었고, 일본 정부는 이 산업 체제를 ‘위안부’ 강제 동원에 이용했다. 


여기서 우리는 ‘강제’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를 알아야 한다. 국제법에서 규정하는 강제란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것’을 말한다. 군인이 머리채를 잡아 끌고 갔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적어도 중일 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38년 일본 육군성은 일본군 위안소 설치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위안부 ‘모집’에 관한 방침을 내렸다. 본격적인 제도화의 길을 연 것이다. 나아가 일본군에 의해 점령지나 전쟁터, 식민지에 설치된 위안소와 다양한 형태의 변형된 ‘위안소’에서, 일본군 위안부들은 인간이자 여성으로서의 존엄을 침해당하고 자유를 빼앗겼다. 이들은 국가범죄의 피해자였던 것이다.


일본군 위안소 제도는 민족차별, 여성차별, 계급차별의 문제이면서 여성에 대한 국가범죄이자 전쟁범죄이다. 제국의 식민지 지배 책임의 문제이기도 하다. 모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과 국내외 시민단체, 우리 정부와 국민들이 일본 정부에 책임을 묻는 이유다. 그렇기에 여성에 대한 국가범죄, 국가책임, 전쟁범죄와 같은 논의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는 <반일 종족주의>를 ‘단지 견해 차이’라는 말로 덮어두고 넘어갈 순 없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908518.html 


이딴 쓰레기책을 왜 읽는 거지??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