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최용건 약력을 검색하면 1921년 오산중학을 중퇴를 했다고 나온다.

 

최용건이 1900년생이니 22살에 중학교를 퇴학을 당했다고 할수 있다. 처음에는 공부를 못해서 졸업을 못했는줄로 예측했는데.. 

 

 

알고보니 불량써클활동하다가 1919년에 감옥을 가게되서 퇴학을 당한거다. 어릴적부터 반항기가 있었던것 같다. 하긴 괜히 빨갱이가 되었을까? 

 

그리고 자료를 찾아보니 오산학교 자체가 좀 불량스러운 선생들이 많았다고 한다. 최용건이 감옥 간 시기가 교장이었던 조만식이 감옥간 시기와 일치한다. 조만식과 함께 3.1운동을  조직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감옥을 나온 최용건은 중국 상해로 가게 된다. 당시만해도 국제여행이 흔치 않았으니 아마도 조만식이 선을 대서 보내지 않았나 싶다. 상해에는 최용건이 만난 사람중에 손문하고 친분이 있는 신규식이라는 양반이 있었다.

 

신규식은 손문 인맥을 이용해 조선청년들을 운남강무학당에 입학시키곤 했다. 그는 임시정부 군사전문가를 만들려는 야심이 있었다. 

 

최용건1922년 중국 최고 육사라는 "운남강무학당"에 들어가게 된다. 운남강무학당에는 유명한 졸업생이 많은데 중공원수가 된 주덕과 섭검영 조선인으로는 양림과  이범석등이 있다.

 

최요건은 우유부단해서 선생들 따라 불량활동 했던거치고는 ㅎ 그래도 인생이 잘 풀린것 같다. 한마디로 빽이 좋았다고 할수 있다.

 

 

 

최용건의 문제는 성격이 거절을 잘 할줄 모른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유부단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강무학당을 졸업하고 24년~27년까지 최용건은 여러가지 신분을 갖게 된다. 

 

 

첫번째 신분은 임시정부의 감찰단원이다. 밀정을 제거하거나 규율을 어긴 사람들을 처벌하거나 첩보원 역할을 하는 일을 하는거다. 숨어있지만 잘 자세히 찾아보면 독립기념관 자료에 나와있다.  

 

 

두번째는 의열단원이었다. 20년대 초반 의열단의 테러활동은 젊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한마디로 요즘 말하면 유행타서 가입을 한거와 같다. 

 

오성륜이가 황포탄에서 다나카 암살에 실패하면서 알려지게 된 사실이다. 당시 암살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최용건도 상해에 있었다. 황포탄 사건 때문에 얼떨껄에 불심검문에 걸려 감옥간게 동아일보에도 나와있다. 뒤에 말하겠지만 오성륜이하고 최용건은 끝까지 인생의 악연이 이어진다. 

 

 

세번째 신분은 조선공산당 화요회 회원이다. 누가 포섭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만주에서 화요회를 창립했던건 조봉암으로 학계에서 유력히 본다. 그래서 만주에 가자마자 책임자의 위치까지 올라갈수 있었지 않나 싶다. 

 

 

네번째 신분은 황포군사학교 교관이야. 중국 국민당의 녹을 먹었다고 볼수 있다. 임시정부의 명을 받아 들어가게 된다. 최용건과 양림이 교관이 되면서 많은 조선 청년들이 황포에 입학하게 된다. 

 

 

 

다섯째 신분은  중국공산당 비밀당원이다. 황포 교장이 장개석이고 정치주임이 주은래였다. 주은래 성격이 매력적이라 수많은 학생들이 빨갱이의 유혹에 빠졌을거다.

 

당시 중공당원이 되려면 보증인을 내세워야 했는데 최용건의 보증인은 주은래 였다고 한다. 중공 최고의 줄,빽을 잡은 거다. 아니다. 어떻게 보면 주은래가 탁월한 선택을 했다고 할수도 있다. 실제로 최용건 아니었으면 신중국이 성립하지 못했을수도 있었으니까.

  

 

한두가지 신분을 갖는것도 어려운데 최용건은 참 복잡하기도 하다. 거절을 못하는 성격이라 그런가?  아마 임정인사(임시정부의 줄임말) 중 가장 많은 신분을 가지고 있었지 않나 싶다. 본의 아니게 최용건은 당시 모든 사상 즉 민족주의와 아나키즘과 공산주의까지 연관이 되게 된다. 

 

우유부단한 성격은 일장일단이 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기에 많은 인맥을 가질수 있었던게 장점이었다면 끊임없이 의심과 오해를 받게 되는 것은 단점이라 할수 있다. 

 

중국공산당은 임정과의 관계 때문에 믿지 않았고 빨치산들은 연안파(의열단)인지 의심했고 임정은 진짜 빨갱이라 생각해서 제거대상으로 올라가게 된다. 인간이라는게 하나로 정의할수 없는 존재인데 당시의 시대상 때문에  각박해져서 그랬던거 같다. 

 

최용건의 다양한 인맥은, 후일 임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맞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바로 민족유일당운동의 광동집행위원 그중에서도 광동대표를 맞게 되므로.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