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대통령 취임 이후 독도문제로 일본과 한판 대결전을 벌리기도 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협정으로 ‘독도를 일본 영토에 포함시키지 않았던 맥아더 라인’이 무효화되자, 이승만은 독자적으로 대한민국 방위수역을 설정했다. 이어 1952년 동해에 평화선을 선포하여 미국의 반대를 무릎 쓰고 ‘포획심판령’을 제정 공포하였다. 한국 영해를 넘나드는 일본 선박을 체포, 억류 등 강경 대응하여 1965년 한일어업협정이 맺어질 때까지 828척의 일본 배와 3929명의 선원들이 나포 억류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에서 일본군의 개입을 천명하자, 이승만은 미국 대사에게 일본군이 개입하면 일본군부터 먼저 축출할 것이라고 하여 일본군 참전을 취소시켰으며 54년 3월에는 국내에 유통 중인 일제 상품 몰수를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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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의 독도 라인과 대마도 영유권 주장에 항의하는 일본인들의 집회. [사진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이쯤하면 이승만은 꽤 강단 있게 우리의 반일감정에 대한 민족적 정서를 대변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승만 집권 시기가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라 자신의 통치이데올로기로 활용하는 견지에서 그랬을 것 같다??? 물론 그런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승만 같은 정치 모리배가 단순히 ‘민의를 반영하여 미국의 반대를 무릎 쓰고’ 그렇게 강단 있게 일을 벌일 리 없을 것이다. 왜일까? 이승만의 반일 정책은 무엇을 노린 꼼수였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승만의 배일정책은 미국에게 자신의 활용가치를 높일 심산이었다는 것이 더 본질적인 측면이다. 혹자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주가를 높이려는 우국충정이 아니겠냐고 우기지만, 독재자들은 자신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을 동일시하는 오류에 빠지고 있는 것을 우리는 독재정권 수십 년의 경험을 통해 배웠다. 이승만의 경우도 우리 국민들의 반일의식을 지렛대로 하여 미국 중심의 국제사회에서 자신의 입지를 좀 더 높이기 위한 얄팍한 책략에 불과했지 진정한 애국심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사실 이승만에게 민족정서로서의 반일의식을 찾아보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이승만은 1905년 러일전쟁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그는 친일단체였던 일진회의 대표라고 자기를 소개하면서 ‘황제가 한국인의 이익을 대변하지 못하고 있으며 일진회가 빠르게 성장하여 곧 국무를 장악하고 정부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을 보아도, 이승만이 애초에 반일의식을 갔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진회는 1904년 일본군을 배경으로 조직된 유신회가 회명을 개칭한 것으로 그해 9월 동학의 잔존세력을 조직한 이용구의 진보회를 매수, 흡수하여 일본의 침략과 병탄의 앞잡이 행각을 벌여온 단체이다. 또 러일전쟁이 한국의 이권을 둘러싼 전쟁이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승만이 이 무렵 일진회의 대표를 자처해 미국 대통령을 만났다는 것은 그가 어떤 유형의 인간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뼈 속부터 친미였던 이승만은 일본의 만행이 갈수록 심해지고 미국과의 갈등이 예견되자, 자신의 친일적 입장을 바꾼다. 그는 1941년 여름 < 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일본과 미국 간 전쟁의 불가피성을 경고하면서 미국의 단호한 대일 압박정책이 시급하다는 주장이 담겨있다.

같은 해 12월7일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하자 미국에게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는 한편, 무기대여법에 의한 군사지원을 요청했다. 또 군사적으로 미국과 협조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광복군과 한국인을 미군에 편입시키는 군사협력 방안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소련의 반발을 고려하여 임시정부를 승인할 수 없었다. 결국 이승만의 '반일'을 지렛대로 미국에게 임시정부를 승인받고자 했던 노력은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결국 이승만은 '반공'을 기치로 하여 미국으로부터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보장받는 길을 선택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일 강경정책’을 지렛대로 한 이승만의 ‘미국에게 자신의 주가 올리기’는 그의 집권 시기 내내 일관된 정책이었다. 남북 휴전회담이 개시된 직후, 1951년 10월 미국의 권고와 주선으로 한일관계 정상화를 위한 예비회담이 있었다. 이때 이승만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명확한 사죄로 70억 달러의 배상을 요구하여 협상은 결렬되었다. 사실상 미국의 한일관계 정상화 요구에 대한 사보타주였다. 이점을 좀 더 살펴보도록 하자.

이승만의 반일의식은 ‘일본을 중심에 둔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되었다. 이승만은 일본은 태평양전쟁 시기 미국의 적대 국가였고, 반면에 한국은 냉전의 최전선에서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미국의 냉전정책에 복무했는데, 미국이 한국을 제치고 일본을 더 우대하는 까닭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승만에게는 당연히 한국이 미국의 아시아정책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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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과 맥아더 [사진출처 전쟁기념관]

사실 샌프란시스코 협정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은 아시아에서 소련과 중국을 견제하는 기본 구도로 미일동맹을 구축하려고 하였다. 분단된 한반도의 대한민국은 미국에게 이미 중요한 변수가 아니었고, ‘미일동맹의 하위개념’ 정도로 다루기 쉬운 범주로 취급되었다. 이승만은 이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승만은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의 기본 구조가 자신의 의도대로 될 수 없음을 간파하고 일본과의 역할분담을 통한 ‘미일관계 못지않은 한미 동맹체제’를 추구한다. 일본이 경제적 측면에서 미국의 파트너가 된다면, 한국은 안보, 군사적 측면에서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런 정책 아래서 집단 안보동맹을 추진했고, 동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파병을 미국에 제안했다.

이승만 정부 시절까지 한일갈등의 가장 큰 상징은 독도 문제였다. 독도는 ‘강치의 멸종’에서도 보았듯이 일본의 어업권 문제이기도 했고, 미일 군사동맹의 정치적 상징물이기도 했다. 이승만은 이승만 라인이라고 부르는 평화선 설치를 통하여 미국에게 한국의 존재를 과시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노력이 역사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는 좀 더 면밀히 따져보아야 한다.

여전히 논란거리인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은 결국 미일동맹 중심의 한미일 삼각동맹체제를 구축하려는 미국의 일관된 대아시아 정책의 산물이다. 미국에게 한국은 미일동맹의 하위 동맹에 불과한 존재이다. 한미일 삼각 군사동맹체제가 완비되면 한반도 땅에 일본의 군화발이 다시 찍히는 사태가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위안부' 비밀 협약과 소녀상 사태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인의 반일감정은 일본이 군국주의를 포기하지 않는 한 결코 타협의 여지없이 높아만 갈 것이며, 미국의 의도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승만은 진정으로 자주외교를 위해서 반일정책으로 일관한 것이 아니다. 현상적으로 독도에 대하여, 동해의 일본 어업권에 대하여, 속 시원한 외침을 주장하기는 했지만, 자신의 정치적 잇속을 위한 것에 불과했다. 우리 국민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반일 이벤트가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의 정상화이다.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는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진정한 사과와 배상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일본 정부의 행태는 이와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우리들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과 강제징용 노동자들에 대한 사죄와 배상운동을 힘있게 전개하여 미국이 아닌 우리의 힘으로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받아내고 대등하고 건강한 한일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

오늘도 무심한 듯 독도에 몰아치는 동해의 파도…. 사라져간 독도 강치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까? 박정희 정권으로 넘어와 굴욕적 한일관계가 수립됨에 따라 우리 국민들의 반일정서는 더 극한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 살펴보도록 하고, 독도 문제가 단순한 영토 문제가 아니라 왜 역사적인 문제인지, 그 의미를 좀 더 강조하면서 글을 맺는다.

김이경 우리역사연구가  minplusnews@gmail.com

http://www.minplus.or.kr/news/articleView.html?idxno=3185 


반일의 화신은 게소리고..지 밥그릇 챙기기에 정신없는..

틀딱 벌레시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