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기적의 논리'가 지배하는 호남, 민주주의는 낙화(落花)하는가

‘시스템 오류’ 뒤에 숨은 오만한 권력...
6년 전 광주 광산을의 데자뷔와 무너진 절차적 정당성

뉴탐사  캪쳐
뉴탐사  캪쳐

비 내리는 호남선, 와이퍼가 필사적으로 앞유리를 흝어내지만 시야는 여전히 진흙탕이다. 2026년 지방선거를 앞둔 호남의 정치 지형은 그 빗길보다 더 위태롭고 미끄럽다. 한때 '민주주의의 심장'이라 자부했던 이곳에서, 지금 우리는 심장이 아닌 '기계적 거수기'로 전락한 민심의 파편을 목격하고 있는 중이다.

김영록 전남지사가 지난 4일 전남도의회 기자회견 에서 뱉어낸 일성(一聲)은 처절했다. "2,308건의 끊긴 전화", "정보에서 소외된 31만 권리당원". 이를 두고 중앙당은 침묵으로 응수하고있다. 민주 정당에서 ‘절차적 정당성’이 사라진 자리를 메우는 건 ‘어차피 당선’이라는 오만한 확신 일것이다. 

이 기이한 풍경은 6년 전, 2020년 광주 광산을의 기억을 소환한다. 당시 박시종 예비후보는 정당한 경선을 통해 신승을 거두고도 '권리당원 명부 과다 조회'라는 프레임에 갇혀 재심과 재경선의 늪에 빠졌다. 중앙당이 제공한 검색 시스템 안에서 벌어진 일을 '불법'으로 몰아세운 민형배 후보의 거친 공세, 그리고 이어진 15% 감점이라는 가혹한 페널티. 결국 원칙보다 '프레임'이 승리했던 그날의 기록은 호남 경선이 공정한 검증이 아닌 '기술적 배제'의 장으로 변질되었음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깃발만 꽂으면 당선되는 호남에서 경선 승리는 본선 보증수표다. 하지만 그 수표가 '공정'이라는 담보 없이 발행될 때, 민주주의의 가치는 부도를 맞는다. 이번 통합특별시장 경선 역시 "객관성과 공정성을 상실한 깜깜이 경선"이라는 절규와 함께 사법부의 차가운 저울 위로 올라갔다. 서울중앙지법에 접수된 증거보전신청과 중앙선관위 고발장은 이 사태가 더 이상 당내 소동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있다.

"고의가 아니라 실수라도 선거는 무효"라는 공직선거법의 대원칙 앞에, '시스템 오류'라는 조승래 사무총장의 해명은 궁색하기 짝이 없다. 정청래 대표가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 막을 지경으로 키웠다는 비판은 결코 과하지 않는 것이다.

전남 순천의 풍경은 더욱 가관이다. 금품 수수 의혹에 '함정 수사'라는 방어막이 쳐지고, 이를 논의하는 지도부의 비공개 회의에선 고성이 오간다. "왜 우리 애 기를 죽이느냐"식의 계파 논리가 도덕성이라는 잣대를 부러뜨렸다. 결국 자격은 유지됐고, 원칙은 수장(水葬)됐다. 이것이 정청래 대표가 호언장담하던 '4무(無) 공천'의 실체인가 묻고 싶을뿐이다.

영광과 무안의 상황은 코미디에 가깝다. 뉴탐사가 파헤친 '가짜 세금계산서'와 '리베이트' 의혹은 구체적인 증거와 당사자의 고백으로 차고 넘친다. 하지만 민주당 윤리감찰단은 단 며칠 만에 "근거 없음"이라는 마법의 주문을 외웠다. 감찰 실무자가 과거 '가짜 미투 공작'을 덮었던 전력이 있는 인물이라는 점은, 이 드라마의 복선치고는 너무 진부한거 아닌가 말이다.

정작 이 기괴한 풍경보다 더 시린 것은 호남지역 사회의 정적이다. 과거 불의 앞에 가장 먼저 송곳처럼 솟아올랐던 호남의 시민단체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중앙 정치권의 실정에는 서릿발 같은 성명을 내던 이들이, 내 집 안방에서 벌어지는 '공천 재난'에는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닫고있다.

혹여 용역 사업과 지원금에 길들여진 시민사회가 ‘워치독(Watchdog)’에서 권력의 ‘펫(Pet)’으로 전락했다는 의혹은 이제 지역의 상식이 된 지 오래다.

시민단체 경력이 공천의 스펙이 되고, 정무직의 징검다리가 되는 구조 속에서 ‘비판’은 곧 ‘자해 공갈’이 되는것이다.

결국 호남은 낭중지추(囊中의 錐), 즉 주머니를 뚫고 나오는 송곳의 기개를 잃었다. 주머니 속에서 스스로 끝을 뭉툭하게 갈아내며, 권력의 손길이 닿기만을 기다리는 고분고분한 송곳들뿐 아니겠는가.

현직 민주당 대표가 출마 선언도 안 한 인사와 오차범위 내 접전을 벌이고, 비교섭단체 의원들을 청와대로 불러 모은 대통령의 오찬 자리는 정청래 체제를 향한 '소리 없는 아우성'인데,그럼에도 호남의 공천 판은 여전히 '친명'과 '라인'이라는 이름의 줄세우기가 한창이다.

정정례 당대표가 옆문으로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민주당 당원들이 부른 '임을 위한 행진곡'은 비극적이다. 그 민중의 노래는 기득권이 된 운동권 정치인들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설명하지 않는 권력은 신뢰를 잃는다."

김영록 지사의 이 말은 민주당 중앙당뿐 아니라 침묵하는 호남의 지식인들을 향한 사자후여야 할것이다. 호남이 민주당의 '영원한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2026년의 봄은 민주주의의 개화(開花)가 아닌, 처참한 낙화(落花)의 계절로 기록될 것이기 때문이다.

굽이진 내리막길, 가속도가 붙은 차체는 멈출 줄 모른다. 빗물에 씻겨 내려가는 것은 아스팔트의 먼지만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지키고자 했던 민주주의의 마지막 자존심마저 저 검은 물줄기에 휩쓸려 가기 전에, 무뎌진 송곳 끝을 다시 벼려야 할 시간이다.

비는 그치지 않고, 호남의 밤은 유난히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