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록의 '축적'인가, 민형배의 '파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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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수도권은 더 이상 ‘집중’의 단계를 넘어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흡수’의 블랙홀이 되었다. 사람과 자본, 그리고 미래라는 희망마저 진공상태로 사라지는 이 거대한 소멸의 파도 앞에서 호남은 너무 오래 고립된 채 버텨왔다.

한때 민주주의의 심장으로 뜨겁게 고동쳤던 이 땅은 이제 ‘인구 소멸’이라는 조용한 잠식에 직면해 있다. 60년 가까이 이 변화를 지켜본 노병(老兵)의 눈에 ‘전남·광주 통합특별시’라는 구상은 단순한 행정적 실험이 아니라, 변방으로 밀려나지 않기 위한 마지막 생존의 언어로 읽힌다.

이 거대한 판 위에 서로 다른 결의 여러 정치인들 중 두사람이 서 있다. 김영록과 민형배. 한 사람은 오랜 세월 다져온 행정의 시간으로, 다른 한 사람은 판을 뒤흔들 자본과 속도의 언어로 이 실존적 과제에 접근한다.

김영록 전 전남지사는 '축적의 시간'을 몸소 증명해 온 인물이다. 완도 군수에서 출발해 장관과 재선 지사를 거치는 동안 그는 서두르지 않되 쉬지 않는 행보를 보여왔다. 그의 리더십은 화려한 수사보다는 정교한 절차와 실질적인 성과 위에 서 있다.

광역단체장 평가에서 줄곧 상위권을 지켜온 저력은 통합 초기의 혼란을 잠재우고 행정의 연속성을 담보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자산이다. 그의 행보는 곡학아세(曲學阿세) 하지 않고 순리를 따르는 선비의 풍모를 닮았다는 평이다.

다만, 소멸의 파고가 덮치는 속도에 비해 그의 신중함이 자칫 실기(失期)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의 시선도 존재한다. 하지만 거대한 통합의 기틀을 다지는 데 필요한 것은 설익은 구호가 아니라, 이해관계를 녹여낼 줄 아는 노련한 조정 능력과 품격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반면 민형배 의원은 정반대의 지점에서 판 자체를 전복하려 한다. 대규모 투자와 에너지 정책을 지렛대 삼아 기업을 유인하고 구조를 단숨에 뒤집겠다는 그의 기획은 분명 매혹적이다. 하지만 정치는 구상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행정은 정치가 아니다. 정치가 '방향'이라면 행정은 '생활'이다. 민 의원이 보여준 강한 개성이 과연 서로 다른 색채를 가진 전남과 광주를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내는 용광로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부호로 남는다.

특히 과거 비서실장의 뇌물죄 구속이나 국정감사 기간 골프 논란에 이은 '무고 고발' 건은 그의 리더십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비판하는 시민을 고발로 맞대응하는 방식은 '윤석열식 입틀막'과 무엇이 다르냐는 날 선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이렇듯 그가 보여준 몇몇 정치적 장면들은 ‘속도’에 비해 ‘균형’과 ‘포용’이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는 불안감을 남긴다. 권력의 크기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그 권력을 다루는 태도라면, 그가 보여주는 방식이 통합의 동력이 될지 갈등의 씨앗이 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결국 호남의 선택은 단순한 인물 비교가 아니다. 안정은 자칫 늦을 수 있고, 과감함은 자칫 위태로울 수 있다. 지금 호남이 마주한 선택은 ‘조금 더 나은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한 번 틀리면 되돌릴 수 없는’ 절벽 끝의 결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뼈아픈 역사를 기억한다. 호남은 늘 ‘옳은 선택’을 해왔으나, 그 선택이 늘 ‘이기는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명분에 충실했던 시간이 실익과 생존으로 직결되지 못했던 갈증이 이제 임계점에 도달했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질문의 방향이 달라져야 한다. "누가 더 옳은가"가 아니라, "누가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정치는 결국 결과로 증명하는 업(業)이다. 발의만 하고 책임지지 않는 정치, 강성 지지층의 목소리 뒤에 숨어 성찰을 미루는 정치는 더 이상 이 지역이 감당할 여유가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선동적인 구호가 아니라 실질적인 결과이며,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 무거운 책임감이다.

설계의 치밀함 위에 결단의 속도를 얹을 수 있는가. 그 균형을 현실로 만들어낼 리더십은 누구인가. 버텨온 시간은 충분히 길었다. 이제는 버티는 것을 넘어 판을 바꿔야 할 때다. 다음 세대에게 또다시 소멸을 걱정하는 질문을 남길 것인지, 아니면 여기서 새로운 출발선을 그을 것인지. 호남의 운명을 가를 조용하지만 무거운 선택이 이미 시작되었다.

필자가 보기에 지금 호남에 필요한 덕목은 '사서삼경'의 지혜보다 더 절실한 현실적 책임감이다. 우리는 그동안 '옳은 선택'을 했다고 자부해왔으나, 그 선택이 늘 풍요로운 삶으로 보답받지는 못했다. 이제는 누가 더 정의로운가를 넘어, 누가 더 유능하게 우리의 내일을 책임질 수 있는지를 따져야 할것이다.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한자성어는 본립도생(本立道生)이다. '기본이 서면 나아갈 길이 생긴다'는 뜻이다. 통합특별시라는 거대한 집을 짓기 위해서는 먼저 주춧돌을 단단히 놓고 기둥을 곧게 세우는 기본기가 필수적이다. 설계도가 화려하다고 해서 비바람을 막아주는 것은 아니다. 치밀한 행정적 토대 위에 과감한 결단이 얹어질 때, 비로소 길은 열린다.

60년의 세월을 이 땅에서 보낸 노병의 눈에 비친 이번 선거는 '버티는 호남'에서 '만드는 호남'으로 나아가는 전환점이다. 전남과 광주의 유권자들은 이제 투표용지 앞에서 차갑게 물어야 할 것이다.

"누가 이 거대한 변화의 무게를 온몸으로 지탱하며, 마지막까지 우리 곁에 남아 성과로 증명할 것인가."

무등산의 묵직한 능선과 영산강의 도도한 물줄기가 이제 우리에게 대답을 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