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사상공단과 장림공단을 지나다닐 때 마다 옛날 생각이 납니다.
90년대 과거 한국은 cnc가 보편적이지 않았고 3축만 대당 당시 돈으로 수십만 달러하는 거라서
중소기업이나 협력업체도 보유 생각도 못했고 대기업이나 국책연구소만 보유하고 있던 시절
한국은 범용선반이나 범용기계조각,방전기로 대응을 다 했는데, 당시 일본은 중소기업도 cnc가 보편적이었고 자기들이 정밀기계를 모두 주도하고 5축까지 사용하던 시절이고 경공업 금형(신발,의류)은
취급도 안 하는 거라 한국의 부산과 대만의 타이중이 전 세계 업체에 금형 제작을 모두 맡았습니다.
일이 너무 쏟아져 나오던 시절이고 당시 기술자들은 우습게 하루 100만 원은 기본으로 찍고 시작했습니다. 사장들과 직원들이 엔드밀 간다고 연마기에 엔드밀 체결하고 갈았던 분진이 뿌옇게 공장 도로 주변에 뿜었죠 imf 때도 고환율로 수출물량이 터져서 너무 잘 되고 했는데
지금 가보니, 경공업 정공장이 모두 폐업하고 알루미늄 파이프,섀시 공장만 있더군요 당시 중국은
아예 수준도 안 되고 일본보다 기술이 20년 뒤쳐진 한국과 대만이 과실을 다 받아먹었던 시절이었죠
어렸을 때 추억이라 얘기해봅니다. 나이키,아디다스,푸마,프로스펙스 등 국내 업체와 세계 업체가 금형 제작을 한국과 대만에게 모두 줬던 좋은 시절 그 당시 숙련공들도 생각납니다.
당시 달러를 그냥 카트에 쓸어담았던 시절이라 허튼 짓 안 했으면 부자 됐을 겁니다.
실제로 저희 아버지도 금형 기술자에 사업을 하셨는데 치과의사 부부와 같은 아파트 살았고 그 사람들보다 훨씬 넓은 평수에 로얄층에 살았습니다. 차도 수시로 바꾸었고 무엇보다 내수시장이 아니라 산업으로 해외로 물량을 밀어내서 달러를 막대하게 벌어들인다는 자부심도 있었고 전 세계 경공업 금형은
한국인과 대만인이 다 해서 전 세계인들 신발과 의류에 우리 기술이 있다는 자존감도 있었습니다.
아버지 왈 "돈이 돈 같지가 않고 우습게 보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