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덕춘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제법 나이가 들 때까지도
저는 제가 또래들에 비해 조금은 특별한 환경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제가 나고 자란 진전면 이명리 마을에는
열네 집 남짓한 집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절반 이상이 제 할머니 집안이었습니다.
저희 집은 집성촌의 종갓집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4남 2녀 중 장남이셨고,
할아버지의 동생분들도 모두 한동네에 사셨습니다.
할아버지의 사촌 어르신들까지 한 마을에 계셨으니,
그야말로 동네 전체가 한 집안처럼 이어져 있던 곳이었습니다.
그 많은 할머니들 가운데
덕춘할머니는 제게 유난히 각별한 분이셨습니다.
어머니 아버지는 늘 바쁘셨습니다.
제 밑으로 여동생 둘이 태어나면서
일과 육아를 함께 감당하시기 어려웠던 어머니를 대신해
저는 덕춘할머니 손에서 자랐습니다.
덕춘할머니는 저를 아들처럼 키워주셨습니다.
저를 업고 산으로, 들로 다니셨습니다.
손자 녀석을 아들처럼 여기시며
뭐라도 하나 더 사 먹이고, 하나라도 더 보여주고 싶으셨는지
지금은 사라진 오서장, 진북장, 진동장, 대정장까지
장날마다 저를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늘 고무신만 신고 다니던 제게
처음으로 베신 운동화를 사주신 분도
덕춘할머니였습니다.
진북장날이었습니다.
그날의 기쁨을 저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국민학교에 입학할 때는
삼촌을 시켜 연필깎이를 선물로 사주셨습니다.
아들 같은 손자가 연필 깎다 손이라도 벨까 걱정하셨던 모양입니다.
어린 마음에 저는
할머니 은혜를 꼭 갚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공부 열심히 해서 상을 받으면
밥솥도 타 오고, 고무 다라이도 타 오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제가 본 ‘상’이라는 것은
동네 노래자랑에서 상품을 받아오는 모습이 전부였으니,
학교에서 받는 상도 그런 것인 줄 알았습니다.
장례를 치르며
그 고마운 마음을 다시 되새깁니다.
덕춘할머니 덕분에
제가 이만큼이나 사람 구실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직 밥솥도,
고무 다라이도 갖다 바치지 못했는데
할머니는 이렇게 먼길 가셨습니다.
덕춘할매.
고맙습니다.
많이 그리울 겁니다.
사랑 주셔서 고맙습니다.
사람 만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제 편히 쉬십시오.
손자 홍표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