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하나가 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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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도착한 첫날 밤.
로렌 오빠 방에서 겨우 잠들었는데…
눈이 떠졌다.
틱. 핸드폰 화면이 희미하게 빛났다.
새벽 03:07
아… 시차적응 너무 안되네.
뒤척이며 다시 자보려고 했지만,
솔직히 그게 시차적응 때문만은 아니었다.
거의 1년 가까이 참아왔다.
화면 속으로만 보던 로렌을 이제 바로 앞에서 볼 수 있는데....
같은 집 안에 있는데....
그때
끼익.
문이 조용히 열렸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실루엣이 보였다.
"Still awake?"
(아직 안 자고 있었어?)
나는 숨을 죽이고 대답했다.
"Yeah… jet lag."
(응… 시차 때문에.)
로렌이 조용히 문을 닫으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말없이 내 침대 옆에 앉더니,
손끝으로 내 머리카락을 살짝 넘겼다.
"I missed you."
(보고 싶었어.)
그 한마디에,
내 안에 있던 감정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나는 조용히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내 옆으로 다가와,
살짝 몸을 숙이며 귓가에 속삭였다.
"Shh. American houses are made of wood… not exactly soundproof, you know?"
(쉿. 미국 집은 나무로 만들어져서… 방음이 잘 안 돼.)
그녀의 장난기 어린 속삭임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내 품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모든 말이 필요 없었다.
한참을 기다렸던 밤.
우리는 서로를 조심스레 조용히, 그러나 진하게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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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아침.
집안 곳곳에서 가족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떴을 때,
로렌은 이미 자기 방으로 돌아가고 없었다.
나는 후다닥 씻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주방에서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난 부엌으로 향했고, 이미 로렌은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Good morning, Park! Did you sleep well?"
(좋은 아침이에요, 박! 잘 잤어요?)
로렌 어머니의 인사에 나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Yes, ma’am. Thank you."
(네, 어머님. 덕분에요.)
그때 부엌에서 로렌이 한마디 했다.
"Oh, he slept great."
(그럼, 쟤 완전 잘 잤지.)
나는 황급히 로렌을 쳐다봤다.
(야! ㅡㅡ^ )
나는 헛기침을 하며 커피를 들었다.
그녀는 그런 내 반응을 즐기듯 싱긋 웃었다.
로렌은 그냥 한 모금 더 마시며 태연하게 굴었다내렸다.
(왜~? ㅋㅋㅋㅋㅋㅋ)
그때 신문을 보던 로렌 아빠가 천천히 신문을 내렸다.
그리고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어제와 똑같은 그 묘한 시선.
"…"
그냥 아무 말 없이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Come on, let’s go. Time for the grand tour."
(자, 가자. 우리 동네 투어할 시간이야.)
로렌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Grand tour?"
(투어?)
"Yep. You’re in my hometown now. Gotta show you around."
(응. 이제 네가 내 고향에 왔으니까 구경 좀 시켜줘야지.)
나는 조용히 숨을 삼켰다.
…좋아. 아빠의 시선을 피할 핑계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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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의 과거 - 미친 듯이 공부한 축구 소녀
로렌이 차를 몰고 나를 데리고 갔다.
"That’s my high school."
(저게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야.)
그녀가 큰 캠퍼스를 가리켰다.
나는 깜짝 놀랐다.
"야, 여긴 아예 경기장이 있네?"
"It’s the U.S., Park. High school sports are big business."
(미국이잖아, 박. 고등학교 스포츠도 큰 산업이라고.)
이후 그녀가 예전부터 다니던 카페에 들렀다.
바리스타가 로렌을 보자마자 반갑게 인사했다.
"Lauren Anderson! Haven’t seen you in forever!"
(로렌 앤더슨! 진짜 오랜만이네!)
"Yeah, been busy. Army life and all."
(응, 바빴어. 군 생활하느라.)
바리스타가 나를 보더니 싱긋 웃었다.
"Boyfriend?"
(남자친구야?)
그러자 로렌이 너무 쉽게 대답했다.
"Yep."
(응.)
커피를 들고 창가에 앉자, 나는 물었다.
"Were you popular here?"
(여기서 인기 많았어?)
"Kind of. I mean, I was on the U-17 national team, so yeah. But I was mostly on the bench."
(뭐, 어느 정도? 내가 U-17 국가대표였으니까. 근데 거기니선 거의 벤치였어.)
"Bench?"
(벤치?)
"Yeah. When I saw the real top players, I realized I wasn’t going pro."
(응. 진짜 상위권 선수들 보니까, 내가 프로로 갈 수준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지.)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So you just gave up?"
(그래서 그냥 포기한 거야?)
"No, I trained even harder. But some things just don’t work out. You either have talent, or you don’t. And I didn’t."
(아니, 더 열심히 훈련했어. 근데 어떤 건 그냥 안 되는 거더라. 타고난 재능이 있거나 없거나인데, 난 없었어.)
그녀의 말에는 미련도, 후회도 없었다.
이미 받아들였다는 느낌이었다.
"So that’s when you switched to studying?"
(그래서 그때 공부로 방향을 튼 거야?)
로렌은 헛웃음을 지었다.
"‘Switched’ is an understatement. I went insane."
(‘방향을 틀었다’고 하기엔 너무 약하지. 난 그냥 미쳐버렸어.)
"Insane?"
(미쳤다고?)
"Yeah. I basically lived in the library. Dating? Didn’t care. I was obsessed with getting into Wheaton."
(응. 도서관에서 살았어. 연애? 관심도 없었어. 그냥 휘튼대 가는 거에 집착했지.)
나는 눈을 깜빡였다.
"Wait, so you never dated anyone?"
(잠깐만, 그러면 연애 한 번도 안 해봤어?)
로렌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Nope. I had bigger priorities."
(응. 연애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으니까.)
…"와."
그제서야 그녀가 왜 이렇게 독한 사람이 됐는지 이해가 됐다.
"But why Wheaton?"
(근데 왜 하필 휘튼대야?)
"I’m not a devout Christian, but I wanted to be in a place with hardworking, disciplined people. Wheaton was the best choice for that."
(나는 독실한 크리스천은 아니지만, 성실하고 절제된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공부하고 싶었어. 휘튼대가 그걸 위한 최고의 선택이었지.)
(* 휘튼대는 개신교 계열 학교 중 명문으로 꼽힌다)
나는 그녀를 새삼 다시 보게 됐다.
단순한 축구 소녀가 아니었어.
진짜 목표를 위해 죽어라 공부한 사람이었다.
"That’s impressive."
(대단하다.)
로렌이 내 눈을 바라보며 능글맞게 말했다.
"So, are you saying dating me is an honor?"
(그래서, 지금 나랑 사귀는 게 영광이라는 거야?)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What? No." (뭐? 아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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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의 미묘한 반응
집으로 돌아오자, 로렌 아빠가 여전히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들어가자, 신문을 천천히 내리고 나만 바라봤다.
로렌이 슬쩍 웃으며 내 팔을 툭 쳤다.
"Don’t mind him."
(신경 쓰지 마)
"I don’t think he likes me."
(나 안 좋아하시는 거 같은데.)
로렌이 피식 웃었다.
"It’s not that. You’re just… unexpected."
(그건 아니야. 그냥… 예상 밖이어서 그래.)
"Unexpected?"
(예상 밖?)
"Yeah. He thought I’d bring home some typical Midwestern guy. Instead, I showed up with a Korean ex-soldier."
(응. 아빠는 내가 전형적인 미국 중서부 출신 남자를 데려올 줄 알았거든. 근데 내가 한국인 예비역 군인을 데려왔잖아.)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Why is that a problem?"
(그게 왜 문제가 되는 건데?)
"It’s not. It’s just… different. So, you’ve got two months to win him over."
(문제는 아냐. 그냥… 다를 뿐이지. 그러니까 앞으로 두 달 동안 아빠 마음을 사로잡아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