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안타깝고 서러워 제가 괜시리 눈물이 나네요..
제 나이 30살에 36살 남편과 아이 둘하고 살고있는 암환자입니다. 내가 죽으면...은 생각해봤지만 이혼 당하면...은 생각해본적 없네요
남편은 암 초진시에도, 전이시에도, 새로운 암 발견시에도 절 환자로 생각하거나, 약하게 생각하지 않고, 평소대로 대해주고 함께 이겨내자는 말 한마디로 위로해줬습니다. 그게 그렇게 힘이 됐고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며 견디고 있을 정도로 울타리가 되어줬습니다..
아플때마다 치료과정은 내가 버티고 힘들면 그만이지만 제일 힘든건 같이 버티고 지지해주는 가족들 .. 기쁠때나 슬플때나 함께 하는건 가족뿐..
저 남편은 진정한 가족이 아니였네요..
나는 숨을쉴수없는 병이었고 자꾸만 말라갔다.
각혈을 하고 산소에 의지하고 한걸음도 걷지못하게 되었다. 지방에선 더는 해줄수있는 치료가 없다며 의사는 내 여명이 1년정도 남았다고했다.
병원생활이 잦아지고 길어지고 그동안 남편이란 인간은 바람이났다. 죽음이 눈앞에 있었지만 내게 면회 한번오지를 않았다.그리고 새벽녘 내가 쓰러져 잠들면 식어빠진 햄버거 하나를 달랑 침대에두고 갔다.남펀은 모태불교였다.상간녀는 개척교회 목사의 딸이었다. 부산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했고
다대포에 그애비의 교회가 있었다. 그년 유@희.
조금 나아져 퇴윈을했고 집으로왔을때 상간녀는
남편에게 전화를했다. 분위기를 감지한 나는
전화기를 빼앗아 상간녀와 통화를했다.
당신 신상 다 안다.더 길어지면 당신부모 찾아가겠다고했다.상간녀는 지애비가 지병이있어서 이사실을 알면 쓰러질거라했다.헤어질거고 이젠 그럴일없을거라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두년놈은 다시 붙었다.나는 다시 상간녀에게 전화를했다.
지난번 미안하다며 빌던년이 내게 말했다.
"남편 간수도 못하는 주제에~"
그후로 나는 젖먹이 아이를데리고 모자센터를 갔고
몸은 더 무너지고있었다.
한계를 느낀 나는 친정부모님댁에서 지냈다.
숨은 더욱더 쉴수없었고 내자신이 곧 죽을것만같아
별거를 했고 시부모는 남편집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시아버지는 내게 전화해 "내가 @@랑 살아보니 니가 왜 못살겠다했는지 알겠다.아부지가 미안하다" 눈물나게 감사하고 죄송스러웠다.
그렇게 친정에서 빌붙어살며 서울 메이저병원을 찾아갔다.162센티 39키로 몸으로 산소호흡기를 끌고 부산에서 서울로 혼자 ktx를 타고 외래를 다녔다.담당 의사선생님도 매번 놀라셨다.
하지만 저체중문제로 수술을 할수없다하셨다.
단칼에.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곤 모든걸 포기하고 울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아이가 있다.이대로 포기하면 안됐다.
그날부터 돼지고기를 삶아 우유를 섞어 믹서기에 갈았다. 그 비린 음식을 꾸역꾸역 마셨다.
산소를 달고 러닝머신에 올라 걷고 또 걸었다.
두달이 지났고 53키로까지 체중을 올렸다.
다시 서울병원을 찾아갔고 그제서야
수술을 허락해주셨다. 6개월후 나는 감사한 수혜자분의 장기를 이식받았다.
수술9년차가된 지금 나는 오픈 5년차 샵 원장이
되어있다. 부산대 음대 피아노전공 유@희!
너도 꼭 너같은 상간녀에게 남편 빼앗겨라!
진심으로빈다
주작이든 주작이 아니든 절대 없을 이야기는 아닐거란 생각은 듭니다. 하지만 저는 더 안타까운게.....
저같은경우는 부모나 자식이나 병에걸려 장시간 회복하지 못한다면....그가정은 정말 정말 너무너무 힘들다는겁니다.
모든것이 파괴 됩니다. 오히려 돌아가시면 잘됐다....하는것도 봤습니다.
한가정의 파탄은 물론 인간으로서 지켜야하는 가치가 파괴되는건 슬프지만 어쩔수없는 현상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