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0년대 말 그가 소유한 토지는 1,000만 평이 넘었다. 대전 시내의 땅만 22만 평으로 당시 대전부의 약 40%가 그의 소유였다.
중일 전쟁 발발 이후에는 다른 친일파처럼 적극적으로 나서 국민총력조선연맹,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 등 전쟁지원을 위해 조직된 친일 단체의 임원을 맡고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있는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이다.
10명의 부인이 있었다고 하며, 5남 4녀의 자녀들을 모두 세도가의 자녀들과 결혼시킨 인맥관리 기술도 유명하다. 내장원경을 지낸 김윤환, 도지사를 지낸 이규완, 윤치호의 사촌동생 윤치오, 이완용의 손자 이병길 등 친일파 인물들과 두루 사돈관계를 맺었다.
광복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으나 반민특위의 해체로 별다른 처벌은 받지 않았다. 대법원 재판을 받았지만 고령을 이유로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6·25 전쟁 시 조선인민군에게 체포되어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 자신이 데리고 있던 마름의 아들이 인민군 장교로 있어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김갑순이 가장 많이 자주 입버릇처럼 사용한 말이 "민나 도로보데스"였다고 한다. 이 말의 의미는 '모두가 도둑놈들이고 다 날강도들이다'라는 것이다. 김갑순은 해방 후 자신은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지만 친일행적을 숨기고 뻔뻔스럽게 살던 악질 경찰이나 친일파들을 보고 환멸하고 조소하는 심정으로 이 말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친일파들도 억울해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출처 : 보거스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