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플이 비슷한 사례로 우니라나라 M-16을 전군에서 사용할수 있었던 계기가.
베트남전 참전을 빌미로 M-16의 라이센스 생산을 원했는데 당시 16은 미국의 최우방국에게도 라이센스를 줄까 말까하는 상태였지만 미국 관계자들은 '한국같이 기술이 낙후된 후진국에서 정교한 프레스 기술을 요하는 16을 생산하지 못할것이다.' 라고 생각하여 라이센스 생산을 허가함...
결과는 미국이외의 제3국에서 생산된 M-16중 최고의 품질을 뽑아냄...ㅎㅎ
참고로, 전쟁중에 한국군이 유독 총기분실 보고가 잦았다고 합니다.사실 한국군이 총기를 분실한게 아니고, 미군으로부터 지급 받은 M16을 교저ㆍ 중 분실했다고 신고하고 추가로 지급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모은 M16은 이후 한국으로 보내서 반자동 소총이었던 M1카빈을 교체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되죠. 배댓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M16라이센스 생산도 이를 계기로 이루어졌구요.
이후 M16의 국내 생산량이 라이센스 수랑에 도달 하기 전에 특허문제를 예방 할 목적으로 K2를 개발 하게 되었습니다.
두코전투
Battle of Duc Co
베트남전쟁에 파병된 국군 수도기계화사단(맹호부대) 제1기갑연대 제3대대 제9중대는 1966년 7월 9일 베트남 중부고원 지대의 쁠레이쿠성 득꼬에 중대 기지를 구축하였다. 캄보디아 국경 부근의 득꼬 지역은 북베트남군(월맹군)의 주요 보급로가 깔린 곳이었다. 제9중대는 미국측의 요청에 따라 미군 제25사단 제3여단에 배속되어 전술책임 지역의 수색과 정찰, 매복 및 침투해오는 적을 섬멸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제9중대는 미군의 작전지휘를 받았으나 최소 48시간 동안 추가 보급지원 없이 적의 연대급 공격을 지탱할 수 있는 탄약·식량·물을 비축한다는 한국군의 중대전술기지 개념에 따라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1966년 8월 9일 오후 2시경에 이틀 간의 중대 규모 수색정찰을 마치고 귀영한 제9중대 중대원들은 외곽 경계병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찍 취침하였다. 같은 날 오후 10시 40분경 북베트남군 제308사단 제88연대 제5대대 예하의 4개 대대와 공병특공대 3개 대대 등 약 700명의 병력이 취침 중인 제9중대 기지를 기습하여 대대적 공격을 퍼부었다. 적의 기습 초반에는 빗발치는 박격포 공격으로 아군의 지휘 기능이 잠시 마비되기도 하였으나, 아군 지원포병의 사격이 개시되자 적의 박격포 공격이 주춤하였고, 그 틈을 따서 병사들이 진지에 투입되었다. 이후 아군의 강력한 반격과 지원부대 출동으로 북베트남군은 숱한 사상자를 남기고 퇴각하였다.
8월 10일 새벽 4시 30분까지 약 6시간에 걸친 혈전 끝에 적군은 유기된 시체 174구 외에 전투 중 운반한 부상자를 합하면 500여 명의 손실을 입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아군은 전사 7명과 부상자 42명의 희생을 치렀으며, 포로 6명, 박격포 6문, 40㎜ 대전차 로켓포 12문, RDP 경기관총 10문, AK 중국제 자동소총 43정, 수류탄 563발, TNT 300파운드 등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2소대장이 부상하자 대원들을 통솔하여 적의 예봉을 꺾는 공을 세운 이종세 선임하사는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이 전투는 1개 중대 병력으로 대대 규모 병력의 기습공격을 격퇴하고 대승을 거둠으로써 한국군의 용맹을 떨쳤을 뿐 아니라, 청룡부대의 짜빈동전투와 더불어 한국군 중대전술기지의 전술적·전략적 가치를 확인한 전투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