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 왜도는 왜도라 불렀습니다.
임란당시나 명나라 왜구 진압군이던 척계광의 의견에도 나오듯 왜도는 도 자체가 뛰어난게 아닙니다.....
당시 명국과 조선의 전투시 착용하는 보편화된 검에 비해 긴것이며 일반 보병 지급용 병기로 비교했늘때 뛰어난겁니다.
전시 사용하는 환도는 짧습니다. 활을 편하게 쏘기 위해서다라는 설도 있는데 당시까지 긴 장검이나 긴 환도는 의례용이었으며, 전시 환도는 로마의 글라디우스 정도의 길이 입니다.
조선과 명에서 인정받은 왜도는 현재 우리가 보는 일본도인 카타나나 그 근처 계열의 작은 검이 아닙니다.
장검이라 표현할만큼 큰칼을 말합니다.
거기에 분업화되어 양산, 일반 검수에까지 지급되는 일본도의 질이 우리나 명의 일반병사의 병기보다 뛰어났음도 사실입니다.
거기에 오다노부나가가 완성한 상비군제와 긴 전란은 병기의 익숙함 다루는 능숙함의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임란 말기 정유재란기에 들어서면 일본측 기록에도 조선군이 상대하기 어려워 졌다고 이야기 합니다.
더불어 일반보병에 상대적으로 짧은 창을 다뤘던 조선군에서 긴 봉을 휘두르는 승병에 일본군이 상대하기 힘들어 한것도 사실입니다.
즉 근접전 장병기의 장점(중국에서 창을 군병기의 최고라 하는것도 같은 의미며 고대에서 중세까지 그리스, 마케도니아, 로마, 스위스 군까지 장창병의 뛰어남이 최고의 군을 보장했습니다.) 상공업의 발달로 인한 상대적으로 대량 양산되는 무기의 뛰어남, 상비군체계와 긴 전란이 낳은 병장기의 능숙함 등이 왜군의 강점이었습니다.
일 예로 일본 무장 중 최고의 공격부대로 평가받는 가토기요마사의 군이 여진과 시험삼아 교전을 해보지만 처절하게 깨진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여진 이후 청의 주력 병기는 복합궁과 창이었죠.
(이러면 우리와 뭐가 다르냐...하겠지만 수가 다릅니다. 조선군에 활을 다루는 군은 군관급에 국한됩니다. 활은 쉬운 무기가 아닙니다. 반면 농경과 사냥, 유목을 함께하던 여진측은 대부분의 남성이 말을 타고, 활을 쏘며, 창을 다룹니다. 반면 우리는 압도적으로 농민, 노비 가 병력의 핵심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