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과"라는거 나는 싫다
왜 사과 안하냐고 따지고
사과하라고 요구하는거 안했으면 좋겠다
사과하라고해서 하는 사과를
사과라고 할수있나?
억지로 하는 사과를 받으면 기분이 좋아질까?
용서가될까?
사과하라는 우리나라 여론이 커져서
만약 일본이 사과한다면
난 더 기분나쁠것같음
아이들한데 역사교육은 중요한데 우리나라 역사교육이 많이 부족합니다. 일단 국영수 이게 앞질러버리니 문제가 되는거 같아오. 역사 1순위가되야되요. 다른나라가더랑도. 그나라 역사도 모르고 무식한짓을 많ㅇ 하거든요 영어 수학 암만잘해도 타국에 대한 역사를 모르면 무식하다른 소리를 듣습니닺
안상호는 대한제국 조선의학교 교관으로 근무했고 일본인 의사들의 경성의사회에 대항하여 경성 의사연구회에서 김익남은 회장 안상호는 부회장으로 활동했습니다. 조선인 처녀를 만나기 힘들었던 35세 노총각 안상호는 의친왕 저택의 비서이던 가와구치 이소코와 조선인의 중매로 결혼한 것 이외에는 평범한 의사의 길을 걸었으며 특별하게 친일로 보이는 행적은 없습니다. 가와구치 이소코가 조슈번의 무사 집안 출신이란 사실은 안상호의 친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총독부가 주도한 대한국민추도회 등 각종 단체에 이름을 올리기는 했으나 그것으로 친일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유학파 조선 개업의 1호라는 유명세 때문에 각종 단체들의 이름 빌리기 요구를 거절하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으며 3.1만세운동의 민족대표 33인중 하나인 독립운동가 오세창과 한일합병을 반대하고 흥사단을 창립한 유길준도 안상호보다도 상급인 대한국민추도회 발기인이었습니다. 오히려 안상호는 독립유공자 오희원이 신민회 105인 사건에서 무죄를 받는 결정적 알리바이 증거를 제공했습니다.
@한머루
제시해주신 문장의 주요 전제들은 역사적 사실과 상당 부분 다릅니다.
안상호는 고종의 주치의 역할을 했던 것이 맞으며 독살설의 핵심 연루자였습니다. 또한 고종의 사인은 공식적으로 뇌일혈이나, 여러 정황상 독살설 역시 학계에서 유력하게 다루어지는 미해결 쟁점이므로 이를 단순한 거짓으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한머루 세부적인 팩트체크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안상호는 고종의 주치의가 아니다: 거짓안상호는 한국인 최초로 일본 의사 자격을 취득한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이왕직(李王職) 전의 및 촉탁의로 임명되어 고종을 비롯한 왕실의 진료를 담당한 주치의(의관) 중 한 명이었습니다.
안상호는 독살설과 전혀 관련이 없다: 거짓 고종이 붕어할 당시 의친왕의 부름을 받고 직접 진료를 했던 당사자입니다.
그는 평소 일본인 아내와 생활하며 철저히 일본식 가정을 꾸리는 등 극단적인 친일 행보를 보였기 때문에, 당시 민중들 사이에서 '일제의 사주를 받아 독을 탄 인물'로 지목되며 독살설의 중심에 섰습니다. 독살설 자체가 거짓이다: 단정 불가 (학술적 논쟁 중) 당시 총독부 의료진이 발표한 공식 사인이 '뇌일혈'인 것은 사실이며, 현대 일부 의학사 연구에서도 문헌 기록을 바탕으로 독살설을 부정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윤치호 일기를 비롯한 당대 기록에 따르면, 고종이 식혜를 마신 지 30분 만에 경련을 일으켰고 시신의 이가 모두 빠져있거나 혀가 훼손되고 사지가 심하게 부어오르는 등 전형적인 독물 중독 증상이 목격되었습니다.
일제의 사망 시각 조작 정황 등 의문점이 뚜렷하여 독살설은 단순한 낭설이 아닌 유력한 역사적 가설로 남아있습니다.
단것을 즐겨 비만이 되었고 뇌일혈로 사망했다: 부분적 사실 고종이 평소 식혜, 커피 등 단것을 즐기고 운동량이 부족했던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기저질환에 의한 뇌일혈은 일제의 공식 발표 내용이며 의학적 개연성도 있으나, 이것만으로는 사후 시신의 극심한 훼손 상태(치아 탈락 등)를 온전히 설명하기 어렵다는 법의학적 반론이 상존합니다.
특정 역사적 인물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것과 별개로, 단편적인 주장만으로 미해결된 역사적 사건의 진위를 확정 짓는 것은 오류를 낳을 위험이 있습니다.
지배 세력이었던 일본 측의 공식 문서 기록과 피지배 계층이었던 조선 측의 당시 증언 및 정황 증거를 교차 검증하여 사안을 입체적으로 조망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객관적인 역사 인식을 갖추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제미나이 3.1 PRO EXTENDED 답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제시해주신 옹호 글은 역사적 맥락을 교묘하게 왜곡한 전형적인 '물타기' 주장이므로 사실이 아닙니다.
비록 안상호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지는 않았으나, 조선총독부 기관지를 통해 자신을 일선동화(日鮮同化)의 모범으로 적극 홍보하는 등 뚜렷한 친일 행적을 남긴 반민족 행위자임이 명백한 팩트입니다.
해당 주장에 대한 구체적인 팩트체크와 반박은 다음과 같습니다.
1.경성 의사연구회 활동 및 김익남과의 억지 비교 주장: 김익남과 함께 일본인 의사회에 대항했다.
팩트: 초대 회장 김익남은 일제의 의사 면허 제도를 거부하고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며 헌신했습니다.
반면, 안상호는 국내에 남아 식민 통치에 순응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일제에 타협하지 않은 애국지사 김익남의 업적에 안상호를 편승시켜 면죄부를 주려는 것은 명백한 궤변입니다.
2. 가와구치 이소코와의 결혼 및 '평범한 의사' 주장
주장: 평범한 늦깎이 결혼일 뿐 친일과 무관하다.
팩트: 안상호 부부는 1913년 일본어 잡지에 '일선동화의 선구'로 소개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1918년 12월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인터뷰에서 안상호는 "조선 옷은 한 벌도 없고 조선인과 상종하지 않는다.
자녀들에게 일본어만 쓰게 한다"며 스스로를 '완전한 일본인 가정'으로 자랑했습니다.
즉, 결혼 자체를 일제의 핵심 식민 통치 논리인 내선일체의 홍보 도구로 적극 활용했다는 점이 치명적인 친일 행위입니다.
@나무손 3. 대한국민추도회 참여 및 오세창·유길준 끌어들이기 주장: 이름만 빌려준 것이며, 오세창과 유길준도 발기인이었다.
팩트: 안중근 의사에게 피살된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관변 단체에 준비위원으로 참여한 것은 사실입니다.
일제강점기에는 명망가들의 이름이 관변 단체에 무단 도용되거나 강압에 의해 오르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세창은 3.1운동 민족대표로 나섰고 유길준은 일제의 작위를 거절하며 평생 반일의 길을 증명했습니다.
반면, 안상호는 이후 대정친목회 등 다수의 친일 모임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며 뼛속까지 동화된 삶을 살았으므로 이들과 동일 선상에서 비교할 수 없습니다.
4. 105인 사건에서 오희원의 알리바이 증명 주장: 독립운동가 오희원의 무죄를 입증해 주었다.
팩트: 의사가 환자의 진료 기록이나 동선을 바탕으로 법정에서 사실대로 증언하는 것은 기본적인 직업적 윤리입니다.
이 단편적인 사실 하나가 그가 평생에 걸쳐 식민 통치 이데올로기를 대중에게 선전하고 일제에 부역한 거대한 반민족 행위를 상쇄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적 인물을 평가할 때는 단편적인 에피소드나 특정 단체 가입 여부 하나만으로 속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 인물이 시대적 위기 속에서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평생의 궤적을 그렸는가를 종합적으로 통찰해야 합니다.
자신의 부끄러운 친일 행적을 희석하기 위해 진짜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이름을 방패막이로 삼는 논리는 역사의 진실을 흐리는 행위이므로, 앞으로 역사적 정보를 접하실 때 인물의 '생애 전반의 방향성'을 기준으로 비판적으로 걸러내는 안목을 기르시는 것을 권해드립니다.
끝.
중년이 되면 정의감에 불타지만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서 현실을 직시하는 넓은 시야를 가져야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창씨개명인 다카기 마사오는 고종이라고 불리는 매국노 개새끼 이희가 나라를 팔아먹었기 때문에 식민지 백성이 겪었어야 했던 생존투쟁의 상처일 뿐입니다. 오히려 나라를 팔아먹은 고종이라 불리는 개새끼 이희와 수하인 이완용 등 권력이 있는 왕공족들은 창씨개명하지 않고도 호의호식했습니다. 5.16 군사정변은 반란 아닌 혁명입니다. 5.16혁명이 없었다면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한국의 압축성장은 불가능했습니다.
@아름다운중년7 역사는 신념이 아닙니다. 역사는 반성이고(헤겔) 역사는 거울이며(사마천) 사유고(콜링우드) 역사는 과거와의 대화(E.H. 카)입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역사는 분노와 당파심으로 쓰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역사를 읽고 배우는 사람도 마찬가지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식민지에서 태어난 죄로 박정희라는 이름이 바뀔 수밖에 없었던 박정희 대통령을 다까끼마사오라고 부른 댁에게서 절망을 넘은 연민을 느낍니다. 1917년 10월 17일 일제 식민지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동학당 출신 몰락한 양반가에서 태어난 박정희 대통령의 집안의 창씨에 따른 개명이 무슨 원죄이겠습니까? 댁은 박정희 대통령이 혁명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1960년대를 살아보았습니까? 박정희 대통령의 사리사욕 증거가 무엇인지 하나라도 제시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