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호는 대한제국 조선의학교 교관으로 근무했고 일본인 의사들의 경성의사회에 대항하여 경성 의사연구회에서 김익남은 회장 안상호는 부회장으로 활동했습니다. 조선인 처녀를 만나기 힘들었던 35세 노총각 안상호는 의친왕 저택의 비서이던 가와구치 이소코와 조선인의 중매로 결혼한 것 이외에는 평범한 의사의 길을 걸었으며 특별하게 친일로 보이는 행적은 없습니다. 가와구치 이소코가 조슈번의 무사 집안 출신이란 사실은 안상호의 친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총독부가 주도한 대한국민추도회 등 각종 단체에 이름을 올리기는 했으나 그것으로 친일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유학파 조선 개업의 1호라는 유명세 때문에 각종 단체들의 이름 빌리기 요구를 거절하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으며 3.1만세운동의 민족대표 33인중 하나인 독립운동가 오세창과 한일합병을 반대하고 흥사단을 창립한 유길준도 안상호보다도 상급인 대한국민추도회 발기인이었습니다. 오히려 안상호는 독립유공자 오희원이 신민회 105인 사건에서 무죄를 받는 결정적 알리바이 증거를 제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