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의 사망 즈음에 만주로 갔고, 1919년부터 1933년까지 간도 용정에서 의료 활동을 했다. 1962년 김교준이 남긴 회고에 따르면 김익남은 1908년부터 일본의 면허를 받지 못해서 군문을 나간 뒤로는 민간에서 의사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만주에서 그래서 김교준의 면허로 같이 병원을 운영했다. 이 즈음에 정구충이 김익남을 만났는데, 정구충은 김익남이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과 접촉하러 왔다고 주장하였다. 정구충의 발언은 구체적이나 다른 사료나 증언으로 검증되진 않았다. #
고종의 사망 즈음에 만주로 갔고, 1919년부터 1933년까지 간도 용정에서 의료 활동을 했다. 1962년 김교준이 남긴 회고에 따르면 김익남은 1908년부터 일본의 면허를 받지 못해서 군문을 나간 뒤로는 민간에서 의사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만주에서 그래서 김교준의 면허로 같이 병원을 운영했다. 이 즈음에 정구충이 김익남을 만났는데, 정구충은 김익남이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과 접촉하러 왔다고 주장하였다. 정구충의 발언은 구체적이나 다른 사료나 증언으로 검증되진 않았다. #
안상호는 김익남 후임으로 조선의학교 교관으로 일했고 일본인들의 경성의사회에 대항하여 경성 의사연구회에서 김익남은 회장 안상호는 부회장으로 활동했습니다. 노총각 안상호는 의친왕 저택의 비서이던 가와구치 이소코와 조선인의 중매로 결혼한 것 이외에는 김익남과 비슷한 길을 걸었으며 특별하게 친일로 보일만한 행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안상호는 독립유공자 오희원이 신민회 105인 사건에서 무죄를 받는 결정적 알리바이 증거를 제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