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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평생 독립운동과 교육사업을 한 데다 전 재산을 그대로 사회에 환원하였기에 한국에서 모범적인 기업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대표하는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독립운동을 했거나, 빈민구제사업을 하는 등 유일한 박사와 비슷한 행보를 하나라도 보인 기업 총수는 동화약품,오뚜기 등 많이 있지만 이것들을 모두 하고 자녀 및 친인척에게 경영권은 물론 재산을 아예 안 물려주고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기업 총수는 대한민국 건국 이래, 아니 한국사에서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박태준 포스코  창업주도 자녀에게 경영권은 물려주지 않았어도 재산은 물려줬으며 오뚜기도 사회 환원은 많이 하고 있지만 경영권 세습만은 포기하지 못해 함태호 -함영준부자 세습에 손자 함윤식의 3세대 경영까지 준비하고 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그는 본격적인 독립운동가로서의 면모도 지니고 있었다. 1909년 박용만이 설립한 한인 소년병 학교에 입학하고, 1919년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에서 독립운동결의문 기초작성위원으로 선임되어 대회장에서 직접 낭독했다. 1930년대 후반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1941년 해외한족대회에 참석하고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42년 CIA의 전신인 OSS의 한국 담당 고문으로 활약하고, 군사 훈련도 받았다. 재미한인으로 이루어진 한인국방경비대(맹호군) 창설을 주도했으며, 1945년 버지니아에서 12개국 대표 160명이 모인 IPR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전후 일본 처리 문제의 논의에 가담했다. 

 

그리고 미국 워싱턴 OSS의 냅코 작전에 1조 조장으로 참가한다. 냅코작전에 참여한 공작원들은 OSS의 지휘 아래 강도 높은 군사, 첩보 훈련을 받게 되는데 당시 유일한의 나이는 무려 50살이었다. 고등학생 때 미식축구 선수로 활동했으니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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