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쟁 전설의 중대전술기지


※ PC로 보시는게 더욱 가독성이 좋습니다 ※


베트남전쟁에서 국군은 1인당 전투교환비로 무려 1:24

라는 가까운 엄청난 전비를 이끌어냈습니다.


이런 대단한 교환비와 또한 최강의 전투능력을 만들어준데에는

최강국이었던 미국마저 실패할거라 예측했던 그 전술을 주로

사용했고, 국군만의 특이한 작전 방식에서 기인합니다.


오늘은 그 특이한 전술과 작전방식 그리고 해병대의 최고전적이자

베트남전쟁 단일전투 최고의 업적인 짜빈동전투도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짜빈동 전투1967년 2월 14일~15일 하루동안 국군과 월맹군 (북베트남군)

베트콩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베트남전쟁 파월국군을 통틀어 단일작전에서 가장 큰 성과를

얻어낸 작전으로, 무려 하루동안 현 해병대 2사단인 제 2 해병여단 (청룡부대)

제 3대대 11중대와 1대대 1중대 3소대의 병력 294명(장교 10명) 이 월맹군과

베트콩으로 구성된 1개연대급 적 약 2400여명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무려 교전결과만 해도


국군- 15명 사망/33명 부상 VS 월맹/베트콩- 234명 사망/ 2명 포로


이렇게 됩니다.


이 대승을 거둔 2여단의 11중대를 주축으로 구성된 방어진은 베트콩과 월맹군의

활발한 활동과 전황이 수시로 뒤바뀌는 베트남 중부의 매우 위험한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바로 꽝응아이성 입니다.


꽝응아이시를 기점으로 12시방향에 약 10여km 남짓 위치해있는 지면에서

30m 정도 높은 구릉지대에 타원형의 전술기지를 차렸고, 수시로 게릴라전과

소규모 전투가 오간 곳이고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기지자체를 탈취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에서,


청룡부대 해병대원들이 겨우 1개 중대급규모로 1개 연대를 방어해낸

비결은 바로 중대전술기지 에 있습니다.



여기서 언급하는 중대전술기지 란, 중대급 부대가 후방지원이 가능한

포병부대의 사거리 즉 영향권을 두고 주요지점에 원형으로 빙 두른

전술용 방어기지 입니다.


위에 사진에 보이듯이, 일단 철조망을 외곽에 원형으로 두르고

2-3중으로 해놓은뒤에, 조명탄,지뢰,네이팜,함정 등을 설치하고

그 내부에 다시 철조망을 두르고 최소 통행로만 남겨둔뒤, 핏줄처럼

연결된 참호를 따라 부대를 원형으로 배치하면서,


중앙에 다시 부대를 배치하고 보급과 의식주가 가능하게 시설물을

설치하고 감시탑과 헬리패드를 장착하는 매우 심플한 구성이었습니다.



실제 청룡부대가 사용한 중대전술기지의 디오라마를

살펴보면 보시다시피 이런 형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철조망을 2중으로 쌓고 그 사이사이 조명탄과 지뢰등을 깐 다음 내부에

기관총등의 공용화기 진지와 참호를 둘러 연결하고 다시 중심부에는

지휘부와 보급/의식주 시설물과 헬리패드등이 배치된 형태입니다.


이 전술기지가 뭐가 대단하냐라고 생각했던 미군은 사실 처음에 국군의

전술에 대해 매우 의아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것이, 미군은 대규모의 장비와 당시로써는 따끈따근한 헬기라는

물건을 통한 기동전술을 주로 해왔는데, 이렇게 수십~수백km를 이동한뒤, 전투

지역에서 하차전투를 하다가 수틀리면 다시 차량에 타고 지역을 퇴각하는

방식 이었습니다.


여기에 항공지원과 포병지원이 더해져, 항상 미국 전쟁영화에 나오는

영웅같이 싸우다가 헬기나 장갑차타고 바람같이 멋있게 탈출하는 장면도

어쩌면 이런거랑 매우 비슷합니다.



그렇기에 미군은 오히려 전투지휘의 최소단위인 중대규모 (소대는 편제

기본단위) 로 사방에서 오는 적을 그것도 독립으로 고립된거나 마찬가지인

상태에서 싸우면 즉각 궤멸될 줄 알았던 겁니다.


거기에 중대전술기지가 방어 외에도 확장을 위한 전진기지로도

쓰였기에 미군입장에서는 "저게 뭔 뻘짓이야" 소리가 나올 수 밖에 없

었기도 했습니다.



그랬던 만큼 한국군도 생각이 있었는데, 일단 전쟁의

상황과 현실을 먼저 보았습니다.


1. 국군은 미군에 비해 장비수준과 기동력이 낮고


2. 정규전보다 후방과 중부에서 민사지원과 치안유지가 주임무


3. 주로 베트콩과 같은 게릴라전 위주의 전투양상


이 세가지는 한국군의 중대전술기지를 사용한 전술체계에 매우

효과적입니다.


간단히보자면, 미군처럼 대규모 기동전투를 할 수가 없고 할일도

없고 게릴라전이 위주니 미국과는 정반대의 전술을 택한겁니다.



이 기지를 구성하는데 역시 그 철학이 담겨져 있는데,


아무렇게나 좋은 터에 기지를 차린게 아니고 몇가지 사항이 있습니다.


1. 아군 포병과 보급대의 지원/작전범위내에 있어야하고


2. 민사지원이 가능하도록 마을이나 전략촌과 가까이 있어야하고


3. 전술기지간의 거리는 최소 10km로 둔다


이렇게되면,


자연스럽게 베트콩과 민간인을 따로 색출해 확인된 사람만 내부로

분리해놓고, 전술기지간의 거리자체가 작전범위가 되어 수 많은 전술기지가

연결되 사실상 하나의 전선을 이루었기에,


빨치산과 게릴라전술을 군이 역이용하는 것입니다.


민간인은 색출해서 기지로 이은 전선의 안전지대에만 따로 분류하고

방어를 하면서 바둑을 두는 것처럼 야금야금 전진을 할 수도 있는데다

기지간 작전거리덕에 원할한 보급과 대민지원을 통한 사기,우호도

향상까지 거의 만능에 가까운 물건입니다.



그에 반해 당시 미국이 사용했던 전술은 베트남전쟁 환경에서

어려울 수 밖에 없는데,


일단 중장비와 항공기와 포병대 끌고 싹다 밀어버리는 것은, 정규군에게

엄청난 효과를 나타냈지만 오히려 민간인으로 위장하거나 편제가 없는

빨치산과 베트콩같은 게릴라들에게는 어렵습니다.


일단 언제든지 신분위장과 하려는 생각이 있는 사람으로 재편성이

되는 게릴라를 상대로 정규군의 치고빠지는 전술이 통하기 힘들뿐더러,


이렇게 게릴라가 재편성과 신분위장을 하는 사이 정규군으로 치고

빠지며 안전지대나 전선을 오락가락시키면 안전하다고 판명된

마을과 전략촌이 베트콩 손아귀에 들어가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게다가 이 짓거리를 한다고 정글에 고엽제를 뿌리고 대규모 폭격을

하는바람에 민간인 오폭까지 발생해서 자연스레 주민들 자체가 미군에

반감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그리고 그 짓거리를 걸프전과 이라크전 이후 엄청나게 불어난

반미 게릴라 테러단체들에게 쓰다가 또 한번 코뼈가 뿌러졌지요)



이 중대전술기지는 모든 국군이 애용했고, 위에 설명한 짜빈동전투 외에

현 수기사인 맹호부대 가 사용한 중대전술기지는, 두코 전투 에서 무려 아군사상

자 사망 6명 부상 40여명만 남겨두고 적 189명 사살/포로 6명 및 중화기/보급품

노획이라는 엄청난 승리를 거두는데 한몫했습니다.


약 2만명의 국군장병들을 중대단위로 쪼개 10km 단위로 건설한 중대전술기지에

배치해 게릴라전을 방어하고 주민들을 보호하자는 전술개념을 개발하고 실천한

채명신 장군 은 소규모 부대의 각개격파로 인한 전선붕괴를 걱정한 미군에게


도리어 중대급 파이어베이스 로 불리며 연구대상이 되었습니다.



이 전술기지를 통해 효과적인 전선확보로 안전지대에 민간인만 분류해놓고

보급과 통제와 지휘까지 원할한데다 일단, 월남에 파병된 국군장병들

자체가 전투력과 사기가 나라를 위해 헌신한다는 개념으로 매우 높았기에


이러한 결과가 나올 수 있었습니다.


즉, 파월국군 1:24 교환비 는 자체적인 전투력도 전투력이지만, 이런 방어전술에

능하여 저 중대전술기지 덕에 엄청난 능력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국군이 머리만 쓰고 전투력이 낮은것도 아닌지라, 당시

베트콩과 월맹군 혹은 당대 만들어진 문서들을 보면 승리가 보장안되면

한국군과 교전을 피하라 라고 하거나 비무장 한국군도 태권도라는 무술로

단련되었으니 덤비지마라 같은 무용담스러운 얘기도 나돌았습니다.


근데 결과만 놓고보면 사실입니다. 태권도 자체는 이미 의무부대나 교육단이

베트남인들에게 대민지원을 목적으로 태권도 보급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국군의 이 대 게릴라전술이 잘 먹혔던 이유는...



이미 해방이후부터 남로당계열과 조선인민유격대 (빨치산) 과 같은

개념의 게릴라세력에게 수시로 당하고 처리하고


무엇보다 6.25때 이미 이런류의 전투를 겪어본 말 그대로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이때 행해진 일명 빨갱이 색출반란세력 처형 등이

국군과 경찰의 가장 우선적인 임무였는데,


이미 여러 산과 전국 도(道)에 지하조직화된 빨치산들을

상대하다보니 걔네들이 하는 행동과 전술을 간파해서


 그걸 그대로 월남에서 역이용했고 마침 예전에는 잘 쓰다가 자동소총과

헬기등의 등장으로 실용성 없다고 판단된 전술기지를 잘 꾸려나가서


게릴라들이 가장 주요목표로 해야할 민심지원이나 선동/세력확장을 차단

하고 그 분류된 민간인에게 아군이 더 큰 지원을하여 변심을 막고

전선을 꾸려 혹여나 전황이 불리해지거나 수시로 뒤바뀌는걸 함께

막아 아예 지역내 게릴라의 세력확장을 막았습니다.



아 물론, 40~50년대 국내에 있던 빨치산들이 망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적극적인 색출과 섬멸작전을 수행한 군경의 자세도

있긴 했지만,


엄연히 월맹군의 휘하세력이나 마찬가지고 합동작전에 지원까지

줄줄이 해줬던 베트콩과는 다르게


애초에 북한은 얘네를 자기네 공식 휘하세력으로 안 쳐줬고 그럴생각도

없었기에 "동무들은 잘하고있소!" 하면서 계속하라고 명령만

할뿐 지원과 보급이나 합동작전 자체를 거의 안했습니다.


그리고 이 빨치산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군대와 달리 편제나 작전개념을

따라하기 힘들고 부대를 충원하고 어디 숨어있다가 지원과 보급을

잘 받을라면 우선 해당 구역에있는 민간인들의 민심을 달래거나 최소한

뜻을 함께 하자는 차원에서 선전이라도 해야 주민들이 군경의 색출작업

이 와도 숨겨주고 "그런거 몰라요" 라도 할텐데


얘네는 그런거 없이 그냥 경찰서건 관공서건 닥치는대로 테러하고

유격작전이 아니라 마치 자기네가 진짜 군대인것 처럼 대놓고 군경과

맞불을 지피는 행동을 했었고 일단 지들생각에 혁명에 반하는 분자라고

보면 민간인이건 군경이건 인민재판으로 즉격처형하고..


지휘부는 커녕 뒤를 봐줄 거대세력도 없거나 이미 본진은 북한내의

권력다툼에서 숙청당해 결국엔 자멸에 가까운 짓을 하게됩니다.


물론 이 조선인민유격대등의 빨치산들이 해먹고간 뻘짓으로 난 인명

피해와 손실은 고스란히 민간인들이 받았고 지금도 70대 이상 어르신들은

대부분 빨치산과 유격대하면 학을떼는게 거기에 있습니다...



쨋든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빨치산에 대한 얘기를 잘 보셨다면 이해가

빠르시겠지만 다시한번 중점적으로 설명하여 게릴라가 해야할 민사심리전과

유격전술을 정면에서 방어하고, 중장비나 편제가 없는 게릴라를 상대로


대인저지력을 엄청나게 올려주면서 걔네들이 해야할 민사심리전을 우리가

독점할 수 있으니 결국엔 우리가 고립되고 격파될듯한 형태를 보여도 정반대가

될 수 있다는겁니다.


지형 역시 일반적인 곳에 기지를 꾸리지는 않고, 주로 게릴라들의 본거지와

비슷한 산악지대나 구릉지대에 꾸려서 정찰/수색과 정보탐색에 유리하게

만들고 적의 기동력을 상쇄시키면서 유인섬멸까지 가능토록 합니다.


그리고 전술기지 자체는 원형 또는 타원형으로 구성되어 모든 방향으로

화력을 집중시키는 것 역시 유격전술을 사용하는 게릴라에게 엄청난 효과를

주었으며, 그냥 정규군이 게릴라전술을 그대로 역이용한 것입니다.



다만 이 만능같은 전술기지도 문제가 있는데,


우선 이 중대전술기지 자체의 전투시너지효과가 극대화되어서

정말 전황이 불리하거나 옮길때 제대로 기지를 처리안하고 떠나서

그걸 적이 꿀꺽하면 탈환전투때 희생이 엄청나게 커집니다.



대표적인 예이자 파월국군 단일작전에서 가장 큰 패배를 안긴 사건...


짜빈동 전투에서 불과 한달전에 일어난 "짜빈박 전투" 가 그것입니다.


게다가 두 전투모두 같은 청룡부대의 3대대를 주축으로 발생한 전투입니다..


1967년 1월 10일 에 일어난 이 전투는 위에 보이는 197고지

아군 청룡부대 3대대 11중대가 사용하던 전술기지가 있었는데, 베트콩과

월맹군이 자주 출몰하는 인근 지역에 98고지 가 방어와 작전에 훨씬 유리함을

깨닫고 전술기지를 이전하게 됩니다.


문제는 98고지가 워낙에 적이 자주 출몰하고 당시 투망작전 을 위해

197고지에 신경쓸 여유가 없어서 기지를 이전할때 197고지의 전술기지의

기지 형상을 그대로 냅두는 실책을 하게됩니다.


당시 이미 지역 평정을 완료했던터라 안전하다 판단하고 위험물만 제거하면

되겠거니 해서 그냥 이전했고 적 정규군이 올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문제는 1월 10일 당시 안디엠마을 부근에 월맹군 중대규모가 들어왔다는

첩보를 받았는데, 이미 지역평정이 끝났고 그 곳은 적의 침투가 한번도 없던

터라 대대장에게 첩보자체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결국 14시 30분경 40고지와 197고지를 사이에 두고 도보진격 도중 적의

일격을 받는바람에 그대로 전위소대가 전멸하고 뒤따라온 본대 지원세력까지

극심한 피해를 얻다가 197고지를 점령한 적에게 반격을 당해 큰 피해를

얻게 됩니다.


무려 적이 양쪽 고지를 점령한데다 전술기지를 제대로 제거하지 않고

안전하다 판명하여 첩보를 무시한 (사실 당시 거짓첩보나 허위첩보가 많았음)

결과가 어떻게 됬는지 그걸 써왔던 국군이 직접 겪게 된 것입니다...



이 사태로 거의 중대하나가 날아가고 고립된 부대가 적의 맹공을 받은 동시에

뒤따르던 지원부대까지 큰 피해를 받게됩니다.


거기에 전위소대 하나가 전멸했다는 소식에 대대장이 선임부사관을 이끌고

도망가는 바람에 전방에 설치된 대대 지휘소가 제기능을 못했고 결국

고립부대를 향해 적의 포위가 쉽도록 만든 희대의 인재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어쨋든 이 전투를 교훈으로 파월국군은 어디서든 적이 나타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전술기지는 무조건 완전 해체한뒤, 모든 첩보를 상급부대에

보고하면서 해결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치욕을 받은 3대대는 그대로 한달뒤 위에 설명한 짜빈동전투로

몇배수준으로 되갚아주게 됩니다.




적의 정규군과의 전투보다 게릴라와 민사심리전의 효과를

충분히 깨닫고 실천한 이 중대전술기지는 베트남전쟁에서 민간인들에게

충분한 대민지원을 수행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으며 이는 그대로

파월국군의 이미지를 향상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고,


실제로도 이 전술기지덕에 국군의 작전지에 있으면 안전하다는

소문이 돌아 민간인들이 대거 작전지역 내로 몰렸던 적도 있습니다.


경험과 적을 뛰어나게 간파해 역이용하는 당대 정규군들의

전술과는 180도 동떨어진 전술을 택한 파월국군은 그 효과를 몸소

입증해냈고 뛰어난 전비와 작전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