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외수의 "감성사전"중) 


오늘의 정오는 어떠셨나요? 배를 채울 궁리를 하셨나요?
그조차 궁리할 여유가 없으셨나요?
3월이 시작됐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3월 1일은 따뜻했죠.
앞으로 몇 차례 꽃샘추위가 지나가겠지만 그마저 봄의 별명 같습니다.


이제 웅크렸던 몸을 펴서 밖으로 나가볼까요?
오늘은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볼까 해요.
일명 “책으로 배운 여행”


한때 “책으로 배운 연애” “책으로 배운 요리”
“책으로 배운 화장” 이런 말들이 유행한 적이 있었죠.
오늘은 책으로 여행을 배워볼까 합니다.
이게 시발점이 되어서 회원님들을 더 넓고 상쾌한 곳으로 나갈 수 있게 하면 좋겠습니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책으로 이름을 많이 접해보셨을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이란 책에는 이런 부분이 나옵니다.

 

“여행할 장소에 대한 조언은 어디에나 널려 있지만, 우리가 가야 하는 이유와 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듣기 힘들다. 하지만 실제로 여행의 기술은 그렇게 간단하지도 않고 또 그렇게 사소하지도 않은 수많은 문제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여행에 대한 열망이 생기는 순간이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떠나보게 되면 알 수 있다는 말이 아닐까요?


회원님들은 여행을 좋아하시는 편일 거예요. 반면 늘 여행을 마음에 떠올리지만 떠나는 건
큰 마음을 먹고 가야한다는 부담에 망설이다 포기하시는 분들도 있으실 거예요.


“왜 여행을 떠나나요?”라고 묻는다면 알랭 드 보통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삶은 모든 환자가 자리를 바꾸어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힌 병원이다. 이 환자는 난방장치 앞에서 앓고 싶어하며, 저 환자는 창가에 누워 있으면 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그는 부끄러움 없이 자신도 그런 환자들 가운데 한 명이라고 인정했다. “늘 여기가 아닌 곳에서는 잘 살 것 같은 느낌이다. 어딘가로 옮겨가는 것을 내 영혼은 언제나 환영해 마지 않는다.”
                                                                (여행의 기술 p.48)

 

우리가 휴게소와 모텔에서 시를 발견한다면, 공항이나 열차에 끌린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 건축학적인 불안전함과 불편에도 불구하고, 그 유별나게 화려한 색깔과 피로한 조명에도 불구하고, 이런 고립된 장소에서는 이미 터가 잡힌 일반적인 세상의 이기적인 편안함이나 습관이나 제약과는 다른 어떤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은연중에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책, p.84)

 
 

혹시 여러분도 이런 마음에서 떠나고 싶은 마음이 생기시나요?
그렇다면 우선 책으로 함께 여행을 떠나보겠습니다.
같이 여행을 떠날 책, 곽재구 시인의 “포구기행”입니다.




 


 


파도를 경험한다는 것, 말로 표현이 가능할까.

 
 

여행이라고 해서 멀리 떠날 필요 없죠.
지금 내가 보고 싶은 것, 느끼고 싶은 공기가 다른 곳에 있다면 그곳을 찾아가는 것,
그 행동을 바로 여행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은 일상이 힘들 때 바다가 보고싶어지죠. 그리고 그 파도라는 강렬함도 떠올리게 됩니다.
곽재구 시인은 동해안이 펼쳐진 곳에 있는 화진을 찾아가며 파도와 계절 그리고 태초를 떠올렸습니다.

 



 
(화진바닷가)




파도들, 태초부터 우람하게 존재했을 거대한 파도들의 축제가 이곳 눈부신 모래바다 위에 펼쳐지는 것이다. 지나간 계절은 혹독했고 쓸쓸했으며 위대했다. 눈보라가 몰아치고 나무들의 나신이 뿌리 뽑혔으며 삶의 방황은 끝이 없었다. 그러나 이곳 바다에서는 늘 새로운 꽃이 지고 꽃이 핀다. 봄의 냄새가, 밀려오는 꽃향기가 파도의 이랑 하나하나마다 깊게 스며 있는 것이다. 아무도 그 축제를 거스릴 힘은 없다. 힘들수록 더 거세게 부딪치고 싶은 열망, 새로운 계절은 지나간 계절의 혹독함을 부드러운 숨결 속에 묻는다. 광기도 고통도 열망도 다 파도의 꽃이파리 속에 따뜻한 두 손을 펼쳐드는 것이다.

겨울꽃은 지고 봄꽃 찬란히 피어라.                                     p.26~27





이젠 시인의 시선에 따라 내 눈앞에서 보았던 바다를 다시 느껴보는 겁니다.
가능하다면 내가 생각하는 파도와 닮은 것들을 떠올리며 시간을 보내보시는 건 어떨까요.
쓸쓸하고 추웠던 겨울이라면 이젠 파도에 밀려보내는 것도 좋겠죠.

 
 

 

내가 꿈꾸던 곳, 여전히 미지인 이 땅 어딘가의 장소.

 

이번엔 내가 가보고 싶었지만 아직 발을 딛지 못했던 곳으로 떠나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청도 등대)





어청도. 오랜 동안 나는 그 섬을 꿈꾸었다. 햇수로 치면 이십 년이 넘었을 것이다. 대학에 들어가고 나라 안 이곳저곳을 들쑤시며 도보 여행하는 재미에 절어 있을 때 그 섬의 이름은 내게 신비함으로 다가왔다.

어청도, 그 섬에서는 푸른빛의 어족들이 모여 살았다. 등이 푸를 뿐 아니라 눈빛과 비늘, 내장과 피와 뼈, 살이 모두 푸른빛인 어족들, 그들은 푸른빛의 물살 속에서 푸른빛의 유영을 하고 푸른빛의 물이끼를 먹고 푸른빛의 해저에서 푸른빛의 잠을 자고 푸른빛의 꿈을 꾸었다. 그들 곁에서는 푸른빛의 달빛이 쏟아지고 푸른빛의 등대에서 쏟아지는 빛이 그들의 유영을 뒤쫓았다. 그리고 한 사람의 어부, 그의 얼굴빛조차 푸른빛이었을 것이다. 주름이 많이 잡힌 그는 푸른색의 그물을 펼치고 만월의 밤바다에서 평온한 노동을 한다.                                                   p.54.



어릴 땐 어려서 못 가고, 커서는 생활하느라 못 가본 곳이 있죠.
그런데 이젠 어리지도 않고 마음만 먹으면 그곳에 가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일단 마음부터 먹어봅니다.
어릴 때 느꼈던 미지에 대한 동경과 감상은 서서히 잊혀져갔죠.
이번엔 옛날 시인처럼 꿈꾸었던 곳과 꿈꾸었던 영상을 다시 소환하여 가보는 겁니다.
아주 구석에 숨겨둔 마음을 끄집어내는 거죠. 봄이니까요.

 


삼천포로 빠지면

 

이젠 정말 떠나는 겁니다. 그런데 막상 밖으로 나와보니 마음을 미혹시키는 것이 참 많습니다.
잘 모르는 국도로 들어가보고 싶고 멀리서부터 보이는 국도변의 식당간판도 보입니다.
그 음식은 그곳이 아니면 못 먹을 것 같기도 해 망설이게 됩니다.

이렇게 여행은 길을 잃어버릴 때 짜릿하기도 한 법이죠.

 

 
(삼천포 어시장)





진주에서 삼천포로 빠지는 32번 국도에 접어들었을 때 두 명의 아가씨가 손을 들었다. 두 잔의 자판기 커피를 빼 마시고도 가을 햇살이 무료하던 참인데, 나는 차를 세웠다. 삼천포 가는데예……. 아가씨들의 말투가 정겨웠다. 고성을 거쳐 통영을 갈까, 아니면 삼천포를 거쳐 늑도에 들어갈까 잠시 망설였던 행로는 아가씨들의 탐승과 함께 자연스레 결정됐다.
(……) 그들이 탑승하고 나서 차의 주인이 바뀌었다. 운전을 내가 하지만 진로는 그들이 정했다. 나는 그들이 지정해준 길을 따라 몇 군데의 바닷가 마을을 지났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날 농로를 따라 ‘주문’이란 바닷가 마을에 이르렀을 때 그들이 꾸려온 배낭을 풀었다. 놀랍게도 배낭 안에서는 김밥과 삶은 계란이 나왔다. 학교 다닐 적 친한 친구가 이 마을에 살았어요. 자주 놀러 왔지요. 이 바닷가를 꼭 오려고 서울서부터 생각했지요. 나는 이들이 왜 버스를 타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pp.64~67



길을 잃은 곳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곤 하죠.
우리 보배드림 회원님들도 우연히 만나 차 한 잔씩 나눠 마시고 좋은 기억도 나누는 것처럼요.
내 계획이 무너지면서 우연히 만나는 것들이 여행을 완성해주는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자유는 바람이다.

 

여행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두 발로 뚜벅거리며, 자전거 바퀴를 바닥에 새기며,
기차를 타고 마치 영화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운전을 하다가 아름다운 곳에서 잠시 멈추었다 떠나며.
그런데 여행은 바람을 많이 닮은 것 같습니다.
아니 바람을 닮고 싶은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걸까요?




 
(쿠르베의 그림, “바다”)



짐작하시겠지만 내가 바람을 사랑하는 제일 큰 이유는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 중에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겠지요. 그런데 세상사람 중에 그만큼 자유로운 존재가 없다는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많이 쓸쓸할 때,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고 가슴속이 텅 비어 지상 위의 모든 집착들로부터 벗어날 때 드디어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은 아닌지요. 금고에 돈이 쌓여 있고, 도시에 큰 집이 있고, 책갈피 속에 연인의 사랑스런 편지가 가득 꽂혀있다면 그 영혼이 어떻게 가벼워질 수 있을까요. 족쇄에 채워진 채 자신의 몸 하나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지상의 풀잎이나 나뭇잎 하나를 들어 올릴 수 있을까요. 존재의 비상. 그것은 쓸쓸함만이 줄 수 있는 큰 선물이 아니겠는지요.                               pp.175~176




곽재구 시인의 포구기행의 부분을 함께 읽으며 “책으로 배운 여행”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꽁꽁 얼어있던 공기가 풀리면서 바닷가에는 짜고 비린 내음들이 가득해질 것 같습니다.
추웠던 지난 겨울동안 그 냄새가 그립진 않으셨나요?

매연과 소음들이 꽉 차 있는 일상과 내가 없고 일만 있었던 생활에게 “나는 바람인갑다~” 라고
너스레를 떨며 봄을 즐기시는 보배드림 회원님들이 되길 바랍니다.


오늘의 보배드림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