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통령은 우리 국사에 관한 책을 애독했고 그 방면에 조예가 깊었으며 뚜렷한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박 대통령의 역사관을 요약하면, 우리 민족이 세계 어느 민족에게도 뒤지지 않는 역사와 전통, 제도와 문화를 가진 슬기로운 민족이라는 것이다.
박대통령은 이러한 역사관에 입각해서 조국의 재통일이 우리 시대, 우리 세대에 성취하여야 할 민족의 지상명제임을 인식하고 실현가능한 통일방법론을 정립하기에 이르렀다.
“통일의 길이 조국 근대화에 있고 근대화의 길이 경제자립에 있는 것이라면 자립은 통일의 첫 단계가 되는 것이다” 라는 3단계 목표를 설정하고 우선 자립경제 건설을 주도하였고, 북한의 무력침투에 대비하기 위하여 국방역량을 꾸준히 배양해 왔으며 평화통일의 여건성숙을 위해 항상 노력해 왔다.
국방을 위해 지키려 한 목적, 그리고 국방을 위해 갖춰야 할 목표는 가난이 없는 조국, 잘사는 조국이었다. 박대통령이 뇌리에 새기고 국민과 함께 나눠가지려 했던 국방, 경제표어는 수없이 많다.
증산, 수출, 건설, 근검, 절약, 저축, 근면, 자조, 협동, 한손으로 싸우고 한손으로 건설하자, 수출입국, 조국근대화, 유비무환, 자주국방, 부국강병 등등.
박 대통령은 농민 부부의 막내로 태어났다. 박대통령은 심장 한 가운데에 가난에 대한 기억이 배어 있는 것 같았다. 이런 경험이 ‘가난추방’ 이라는 통치철학을 형성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전국에 밤나무 같은 유실수를 심도록 독려했다. 그는 밤나무에 대해 이런 사무치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국민학생 때 수업을 마치고 20리 길을 걸어 집에 오면 배가 무척 고팠어요. 어린 마음에 먹을 것을 찾아 부엌에 가서 솥뚜껑을 여는데 아무 것도 없는 거에요. 하다못해 무말랭이나 장아찌 같은 것도 없고.... 할 수 없이 간장을 손가락에 찍어 먹곤 했지요. 그때 뒷산에 밤나무라도 있었으면 밤을 쪄서 먹을 수 있었을 텐데.... 내가 왜 체구가 작은 줄 알아요. 어렸을 때 제대로 못 먹어서 그래요” 박 대통령은 밤나무가 많이 심어지고 가을에 밤이 많이 열였다는 얘기를 듣고는 “이제는 어린이들이 허기는 면할 수 있게 됐다” 며 무척 흐뭇해 했다.
박대통령은 한국과학기술원에 지시해 밤을 쉽게 깔 수 있는 기계를 발명하도록 했고 기술원은 우수한 기계를 만들어 보급했다.
이처럼 경제분야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가난’을 추방하는 데 최대의 역점을 두고 각종 시책을 꾸준히 추진한 결과, 반만년래의 ‘보릿고개’ ‘춘궁기’ ‘절양농가’ ‘초근목피’ 등의 ‘굶주림’의 대명사가 도시 농촌을 막론하고 완전히 없어졌으며 수출입국정책을 강력히 밀고 나가면서 경공업을 육성하고, 마침내 선진국 수준의 중화학공업을 이룩하여 한국을 중진국의 선두주자로 올려놓았다.
안보면에서는 북한의 끊임없는 무력침투와 위협에 대비하여 250만 명 이상의 향토예비군을 조직하여 무장시켰으며 미 7사단의 철수에 이은 카터 대통령의 주한 미 지상군 완전철수를 대비하여 방위산업의 육성과 국군 현대화에 심혈을 경주하였다.
유비무환을 국방의 기본신조로 삼았던 박 대통령은 우리 국사, 그 중에서도 국난극복사에 관심이 많았다. 문화재 보수에 있어서도 현충사, 금산의 7백의총, 남원의 만인의총 등의 성역화에 주력하였으며 행주산성을 비롯한 의병장과 의병들의 유적 복원과 외세격퇴의 유적지인 강화도의 유적보수 등에 힘을 써서 국민들의 애국심과 국난극복정신의 함양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