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회담을 둘러싼 북한 중국 갈등과 소련의 역할 논문의 일부입니다.
참고 문헌은 중국측 논문들과 러시아의 기밀 해제 문서입니다.


전쟁의 과정 중 작전의 지휘권이 일치되지 않고 진행된 전 투는 문제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11월 말 연합사령부의 구성 문제 를 논의하였던 김일성과 슈티코프의 대화내용을 살펴보면, 김일성은 펑더화이와 함께 연합사령부를 구성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지적하 였다. 김일성은 연합사령부를 설치하는 데는 반대하지 않으며, 박일우 에게 지시하여 펑더화이와 함께 논의하라고 하였지만, 펑더화이가 연 합사령부 구성문제에 대한 논의를 11월 이후에나 진행하자고 제안했 다고 한다.

당시 조선로동당 정치위원회에서는 연합사령부 부사령관 으로 김책을 임명하기로 결정하였고, 이 논의의 결과를 가지고 김일성 은 마오쩌둥에게 박헌영을 보내서 해결하려고 하였지만, 마오쩌둥 은 김일성이 직접 방문하기를 요청하였다.

마오쩌둥의 요청에 따라 12월 3일 베이징을 방문한 김일성은 마오 쩌둥, 저우언라이, 가오강과 회담을 진행하였다. 회담 내용은 전쟁문 제, 통일지휘문제, 군대문제, 양당 간의 관계 문제 등이었다. 이 회담 에서 북한과 중국은 연합사령부 설치에 서로 합의하고, 연합사령부의 사령원 겸 정치위원은 펑더화이, 부사령원은 김웅, 부정치위원은 박일 우로 결정하였다.

회담 후 저우언라이는 “중조쌍방연합지휘부의 성립에 관한 중조쌍방의 협의(中朝?方?于成立中朝?合指?部的??)”의 초 안을 작성하였다.이후 북한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의 연합사령부가 12월 상순 정식으로 창설되어 ‘연사(聯司)’라고 간략히 불리어졌다.

그러나 연합사령부의 구성문제는 전쟁 중 작전지휘권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연사가 창설되면서 철도 관리 역시 중국이 주도권을 갖게 되는데 그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50년 12월 말 중국 측 사령관 류쥐잉(?居英),31) 정치위원 위광셩(余光生), 부사령관 예린 (?林)으로 구성된 동북군구철도운수사령부(?北???道??司令部)가 설립되어 전선을 지원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철로 수리임무를 담당하 고 있었다. 그리고 북한은 조선철도군사관리국(朝??道?事管理局)을 임시로 설립하여 중국과 공동으로 철로관리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공 동으로 관리하는 철도관리 역시 통일된 지휘체계가 없어 문제가 발생 하였다.

1951년 2월 중국 측의 철로 관련 협상대표였던 장밍위엔(?明?)에 의하면 당시 논의에서 중요한 쟁점은 연합운수사령부의 지휘권을 누구에게 귀속시키느냐의 문제였다고 한다. 중국은 당시 북한의 철도 와 기관차 대부분이 훼손된 상태에서 철도에서 운행할 대부분의 차량 을 본국에서 들여오고 있었다.또한 철로의 수리, 물자수송부대 및 탑 승인원 모두가 중국인이었으며, 심지어 철도를 수리하는 기계와 일부 북한의 철도를 담당하는 인력 역시 중국이 공급을 책임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은 철도운송의 정상적인 운영을 위한 지휘에 실질 적인 협조를 제공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북한과 북한 주재 소련고문은 철도운수의 관리권은 국가의 주권과 연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반드시 북한에서 지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결국 이 문제의 해결은 스탈린에게 맡겨졌다.

스탈린은 “부대의 구 성과 전쟁물자의 전선 수송계획은 정확해야 한다. 따라서 북한의 철도 는 반드시 중국사령부에서 관리하여야 한다. 션양 주재 소련 영사의 보고에 의하면, 김일성은 이 의견을 지지했지만, 북한의 다른 사람들 이 이 의견에 반대하였던 것을 알 수 있었다. 만약 나와 소련공산당중 앙의 의견이 필요하다면 중국에서 담당하는 것을 지지하며, 이것은 북한의 이익을 위해서도, 북한과 중국의 더욱 밀접한 국가적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한다.”라는 전문을 보냈다.

결국 1951년 5월 4일 중국과 북한은 베이징에서 “조선철로의 전시 철로관리제도에 관한 협의(?于朝??路???事管制的??)”를 체결하 고 관리체제, 조직기구, 수송력 부분 등에 대한 규정을 만들었다.

철로 관리권은 북한의 내정과 주권에 관련된 문제였기 때문에 연합사 령부 구성문제보다 북한과 중국 사이에 더욱 첨예한 대립문제로 대두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북한과 중국은 이제 본격적으로 합동작전을 전 개할 수 있었으나, 1951년 중반이 되면 전쟁 진행과정에서 대부분의 권한이 중국에게 주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연합사령부가 조직되어 중 국의 북한에 대한 내정간섭은 현실화되었다

1966년 8월 9일 소련 외교부에서 작성한 6 25전쟁에 관한 보고서 에는 중국인민지원군이 주둔하고 있는 기간에 중국인이 북한의 내정 에 간섭하는 일이 허다하였다고 지적하였다. 박일우는 북한군 수석대 표지만 중국인민지원군 사령부에서 머물렀는데, 김일성은 그가 흡사 마오쩌둥의 대표인 것처럼 처신하고, 조선로동당의 지도 권위를 훼손 하려 들었으며, 스스로 당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고 비난하였다.

즉 중국은 박일우를 이용하여 김일성을 반대하도록 선동하였고, 펑더화이 는 김일성의 군사지휘능력을 비하하는 발언을 자주 했다는 것이다. 결국 중조연합사령부 구성 이후 전쟁 주도권은 이미 북한에서 중국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소련은 전쟁 진행에 있어 군사고문단을 파견하 였지만, 이들 군사고문단은 전쟁의 큰 틀에서만 조언을 해주었을 뿐이 고 실제 개별 전투 등은 중조연합사령부에서 처리하였다. 따라서 3차 전역부터는 중조연합사령부의 지휘에 따라 전쟁이 진행되었다. 

참고 문헌
- 션즈화, <마오쩌둥 스탈린과 한국전쟁> 
- 중국 군사과학원 군사역사연구부, <중국군의 한국전쟁사>
- 周恩??事活??事???, ?周恩??事活??事? 下(北京: 中央文?出版社, 2000), 168~169面.
-  ?明?, “?云?勤-?抗美援朝??的后勤保障,” ??代中?史?究?, 第6期(2000), 34面.
- “蘇聯外交部關於朝鮮戰爭的背景報告(1966年 8月 9日)-關於1950~1953年朝鮮停 戰及停戰談判,” 下冊, 1347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