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이 학살의 피해자들 중 일부. 해당 민간인들은 사진이 찍힌 직후 전부 살해당했다. 오른쪽의 블라우스 단추를 여미는 여성은 사진 촬영 전 성폭행을 당한 직후였다
육군 정복 차림의 캘리 소위.
최근의 캘리.
<개요>
베트남 전쟁 중이던 1968년 3월 16일에 베트남 공화국 꽝응아이성 미라이에서 미군이 저지른 학살 사건.
이 학살로 비무장 상태의 민간인들이 347명(미국 측 집계)에서 504명(베트남 측 집계)가량 희생되었으며 희생자의 상당수는 여성, 어린이, 그리고 아기 등 비전투원이었다.
이 사건으로 22명의 미군이 해당 전쟁범죄에 가담한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윌리엄 캘리 중위만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1971년 가택연금으로 감형되었고 그마저도 3년 뒤에 해제되었다.
명목상 군사 작전 중 민간인이 희생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민간인들을 향한 직접적이고 일방적인 학살이었기 때문에 미라이 학살은 전세계에 큰 충격을 불러왔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미국 내 베트남 전쟁 반대 여론은 더욱 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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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로와 처벌>
미라이 학살 사건은 군부의 엄격한 통제로 1년간 철저히 은폐되었다. 국방부는 이 사건을 은폐하려고 했으나 사진기자 로널드 해벌(Ronald Haeberle)이 찍은 학살 당시의 사진이 "라이프(Life)" 지를 통해 1969년 세상에 공개되고 프리랜서 기자인 시모어 허시(Seymore Hersh)에 의해 학살이 폭로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미라이 학살이 세상에 폭로된 1969년은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단계적으로 베트남에서 지상군을 단계적으로 철수를 실행하던 시점이자 북베트남의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인 호치민이 사망한 해이기도 하다.
미군은 즉시 1대대 주요 지휘관과 사병, 상급부대 지휘관들을 조사하기 시작하면서 상급부대에서부터 이미 마을을 초토화시키라는 명령, 확 쓸어 버리라는 명령 등이 나왔음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정작 체포된 장교 14명 가운데 형사처벌을 받은 이는 사건 당시 현장지휘자였던 소대장 윌리엄 로우 캘리 주니어(William Laws Calley Jr; 1943. 6. 8. ~ 2024. 4. 28.) 육군 보병소위 단 한 명뿐이었다. 상급부대의 명령은 명확한 학살 명령임이 증명되지 않은 점을 들어 관용어구 내지 오해로 넘어갔다.
부대원의 증언 중에는 학살 전날에 이미 학살 명령이 있었다는 말도 나온다. 부대원과 상급 장교의 증언이 일치하지 않는데 실제 상급부대에서 직접적으로 학살을 언급했을 가능성보다는 부대원이 죄를 공유하기 위해 거짓 증언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