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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시사 전문 주간지 `타임’은 2015년 11월 보도사진 분야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한 시사 화보 잡지 ‘라이프’ 창간 75주년을 맞아 특집기사를 게재했습니다. 

타임은 이 특집기사에서 ‘라이프’ 잡지의 사진기자였던 데이비드 던컨 씨의 삶을 조명하면서, 

그를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사진작가로 평가했습니다. 

 

1950년 봄 일본 예술에 관한 기사를 위해 도쿄에 3개월간 머물던 그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7월 비행기로 부산에 도착해서

미 해병대와 같이 움직이며 한국전쟁의 실상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스크롤 압박 주의!!

 

의낙 유명하신 분이라 이전에 많이 본 사진들도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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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더글라스 던컨 한국전쟁 당시 본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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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전선에서 해병대 대위. 프랜시스 펜튼은 1950년 탄약이 거의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운명과 부하들의 운명을 곰곰이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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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 미 해병대가 논두렁옆에 죽은 적병을 지나쳐 달리고 있다.


"[베테랑 해병대]는 아래를 향해 돌진할 때, 아래로 내려다보지도 않고 적의 포를 향해 돌진했다. [대한민국, 195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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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뢰로 자신의 지프를 잃은 구급차 운전병이 1950년 그 폭발로 친구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길가에서 흐느끼고 있다.


 

구급차 지프 한 대가 교묘하게 심어진 지뢰를 들이받았고, 폭발로 인해 모든 방향과 기계들이 폭파되었지만, 그의 친구의 죽음으로 영원히 다쳐, 운전자는 그가 착륙한 길가에 앉아 울었다. [대한민국, 1950년 9월]  

- 직역한건데 뜻이 잘 전달되지는 않은 듯하네요. 

지프폭파로 자신도 부상을 입었지만 친구의 죽음으로 영원한 부상(마음의 상처)을 입었다는 표현인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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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총 사수인 레너드 헤이워스는 수류탄, 기관총 탄약, 부상자와 

사망자를 대신할 지원군, 후방에서의 교신 등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의 눈은 산등성이 가장자리를 따라 탐색하며 비 오는 하늘로 올라갔다. 

 

천천히 굵은 눈물이 그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195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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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당한 미국 해병대가 1950년 기관총으로 즉석에서 만든 들것에 실려가고 있다.


" 탄약 운반책 역할을 해온 한국 농민들이 부상자들을 위한  급조 운반책으로 헌액되었다. 

그들의 굳건한 동양인 용모들은 그들이 그들의 바로 뒤에서 격렬하게 치닫는 전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혀 드러내지 않았지만, (서양인이 보기에 동양인의 감정을 얼굴에서 잘 읽을 수 없기 때문인거 같네요)

거친 소작농이 거친 해병을 두 팔로 에워싸고 다른 사람의 부서진 무릎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하는 것 자체가 

자비롭고 부드러운 행동이었고, 위에 무관심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대한민국, 195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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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장진호전투에서 퇴각하던 미군 해병대 대열이 "나이트메어 골목"이라고 불리는 협곡길을 따라 행진하고 있다.


"사단이 고원의 가장자리에 도달한 후, 그 아래의 협곡으로 굽이치는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목을 구부리고, 어깨를 움츠린 채, 눈을 거의 감은 채 걸어갔다. 그 추위로부터는 아무런 보호 장치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냥... 그들의 소총을 들고... 그리고 얼어붙었다. [한국, 195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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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들이 1950년 한국의 장진호에서 후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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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장진호전투에서 퇴각하던 미군 해병대 대열이 "나이트메어 골목"이라고 불리는 협곡길을 따라 행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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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겨울, 한국의 장진호에서 후퇴하는 동안 지친 미국 해병대가 추위에 두건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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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2월 한국전쟁 당시 장진호에서 퇴각하는 동안 멍한 표정으로 두건을 쓴 해병대원이 식량 캔을 움켜쥐고 있다.


"새벽은 지평선 너머에 있었다. 한 해병대원이 그의 숟가락으로 계속 찌르며, 그의 캔에 있는 다른 것들로부터 서리로 덮인 콩 하나를 떼어내려고 했다. 그는 그것을 움직일 수도 없었고 장갑을 낀 거의 단단한 손가락 사이에 숟가락을 계속 잡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는 하나를 발견했고, 천천히 그것을 입으로 올렸다. 그는 가만히 서서 그것이 녹기를 기다렸다. 소원이 있었다면 무엇을 원했을까라는 질문에 그는 빈 눈을 한 채 꼼짝 않고 계속 서 있었다. 그리고 나서 그의 입술이 열리기 시작했고, 그의 눈은 희끗희끗한 하늘로 올라갔고, 이야기 했다 "내일을 달라, "내일을 달라." [대한민국, 195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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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대한민국 서울탈환을 위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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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컨은 라이프지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한국에서 찍은 사진 중 가장 잘 나온 사진"이라며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가족, 아기를 안고 있는 아버지, 탱크가 총격을 가했다"고 말했다. 

저 탱크들이 북한군들한테 공격 받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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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2월 장진호에서 후퇴하는 동안 한 미국 해병이 정지된 지프 안에서 그의 애견의 경호아레 잠을 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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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병대가 1950년 12월 장진호에서 퇴각하는 동안 전사한 전우들의 시신을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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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원들이 1950년 12월 장진호에서 퇴각하는 동안 나이트메어 골목으로 알려진 협곡길을 통과한 후 휴식을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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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원들이 1950년 12월 장진호에서 철수하는 동안 죽은 병사를 실은 트럭이 지나가고 있다.


[장진호에서 흥남 해변으로 이동하던 중, 부상자와 얼어붙은 사람들 만 말을 탔다.] 

"죽은 사람들도 트럭과 트레일러에 올라탔다. 그들의 뒤에서, 즉 비극적인 리듬의 오르내리는 박자에 따른 그들의 뒤섞인 발소리가, 살아있는 사람들을 걸어다녔다. [한국, 195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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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 중대가 1950년 헬멧과 소총을 든 채 단체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전쟁초기 단체 사진 - 이 중 아무일 없이 고향으로 돌아간 이는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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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8월,  해병대 증원군 수송선이 한국 부산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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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으로 향하는 한국 열차에서, 해병대원 두 명이 다른 이들이 먹고 마시거나 총기수입할때 열차복도에서 자고 있습니다. 

[1950년 8월입니다." 1950년 8월 21일 오후 16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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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병대의] 긴 행렬이 교두보 낙동 가장자리에... [한국, 195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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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 3인조 팀이 목표물을 내려다보는 언덕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한국, 195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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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는 낙동강전선으로 진입하는 길에 첫 번째 적의 포격을 받았다. 그러나 대열은 계속 전진했다. 해병대원들은 이제 아름답고 크고 악취가 나는 강철 친구들의 달그락거리는 발자국 가까이 끌어안고 길을 가고 있다. [대한민국, 195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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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전선으로 진입하는 길에 있던 해병대 대열은 멈췄고, 

대부분의 대대는 땅을 파라는 명령을 받고 주변 언덕 꼭대기로 향한다. 한국, 195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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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훈련을 받은 젊은 해병은 길을 따라 논으로 뛰어들어 적군의 포격을 완전히 피했다. 

그러나 모든 캠프와 특별 코스를 통해 그가 경험한 어떤 것도 그의 첫 적군을 직접 만나는 충격에 대비하지 못했다. 

특히 그 적군이 죽은 상황에서... 

그리고 그의 머리의 대부분은 해병대 총알에 의해 날아갔다. 

아마도 그 소년은 전쟁에서 다시 해야 했던 것보다 그의 탄약통을 움켜쥐고 

죽은 남자의 몸 위로 기어가는 것이 더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총격을 받고 있는 다른 병사들의 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아래 있는 시체를 덮칠 때, 

아래를 쳐다보지도 않고 적군을 향해 돌격하는 퇴역군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대한민국, 195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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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8월 해병대가 노네임 리지(무명능선)에서 정찰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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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네임 리지(무명능선)에서는 해병대원이 한 손에는 담배를, 다른 손에는 소총을 들고 비와 소총 소리와 다른 병사들의 소음 속에서 그의 명령을 외쳤다. [대한민국, 195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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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들은 전체 반격의 성공과 주변 방어선 및 낙동강 변두리 복귀를 위해 

언덕의 꼭대기를 차지하기 위한 마지막 돌진을 한다. 한국, 195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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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수류탄, 기관총 탄약, 증원병, 후방과의 통신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레너드 헤이워스는 완전히 망연자실했다.] "그는 단지 무명 능선에 있는 자신의 친구를 다시 데려갈 무언가를 원했다. 빈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지식은 그가 견딜 수 있는 이상이었다. [대한민국, 195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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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총 사수[레너드 헤이워스 상사]가 모든 희망을 넘어 산산조각이 난 것처럼 보였을 때, 

까맣게 입을 벌리고 미소짓고 있는 한 노병사가 젊은 남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아 침착하게 그들이 어떻게 아직도 줄을 잡고 있는지 그에게 말했다. 

비가 내려도 씻을 수 없는 헬멧 아래로 눈물이 여전히 그의 얼굴을 감싸고 있었지만, 올드 마린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대한민국, 195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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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급구호소 밖에는 작은 무리의 해병들이 항상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적과 마주하고 있는 무기와 장소를 빼앗을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이 발견되자마자, 

위의 사격선에서 언덕을 내려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할 말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구호소였던 조잡한 작은 오두막 밖에 서 있었다.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시간이 끝나서 언덕으로 다시 올라가야 했을 때, 

다른 남자들, 그들 같은 다른 남자들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내려왔다. 

그들 역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친구들이 아직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알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대한민국, 195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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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풀밭에 가려 엎드린 해병 한 명이 목표를 향해 사격을 준비합니다. 한국, 195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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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의 반격을 물리치고 밤새 전투를 벌인 후, 해병은 언덕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서울-묵덴(Mukden???) 철길을 건너 적의 수도인 [서울]의 깊숙한 곳으로 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인적이 드문 거리에서만 환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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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원들이 서울 외곽의 산등성이 끝에서 미군기들의 박격포 포격으로 인한 화재가 도시 전역에 퍼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한국, 195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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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시가전을 하는 동안 해병대원들은 고개를 숙이고 조개구멍으로 굴을 파고 들어간다. 한국, 195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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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바로우 대위의 중대원들은 서울의 가장 높은 언덕에 있는 가장 높은 옥상에 작은 성조기를 게양했지만, 언덕 아래로 포격하는 소리가 그들의 관심을 끌었고, 그 깃발 게양은 다른 날의 작은 사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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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 부츠를 신은 북한 중위의 시체가 놓여있는 철책 옆에 멈춘 전령이 죽은 남자의 시체가 단지 또 다른 사실의 진술일 뿐이고, 또 다른 날의 한국 전쟁에서의 또 다른 사건을 본 후, 그는 그의 급보를 전달하기 위해 언덕 위로 계속 올라갔다. [195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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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오랫동안 꿈꿔왔고 지금은 잊혀진 담배가 손가락에 화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었다. [1950년 9월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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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해방에 이어 그날 오후 해병 한 명이 승리와 자유를 만끽한다.] "도심의 거리에서 느슨하게 스프롤을 하고 커피를 데우고 콩 캔을 먹을 수 있는 자유는 그가 순간적인 생존을 위해 다른 벽 뒤로 깡통을 던져 버리게 만들었다. [195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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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에서 불어온 바람 - 만주와 시베리아 스텝 너머- 압록강과 주변의 산들 - 지금은 비명 지르고 거친- 그 바람은 갇혀있는 해병대에 의해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곳을 통해 행진해야 했다. [대한민국, 195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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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휘부대가 고원의 가장자리에 도달하고 협곡으로 굽이치는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한 후, 차량들은 비록 매우 느리게 움직였지만, 얼음 위에서 통제불능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조되었다. 다른 이들은 옆으로 넘어져 기둥 끝에 있는 트랙터에 의해 구조될 때까지 누워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경계선 너머로 돌진했고, 가능한 마지막 순간에 남자들이 뛰어내려 멀리 아래 바위에 충돌했다. [대한민국, 195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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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에서 고통스럽게 철수한 후, 제1사단 해병들은 크리스마스 전날에야 마침내 흥남의 해변에 도착했다

그들은 수염을 기르고, 다른 모든 남자들 사이에서 홀로 서 있었지만, 살아있었다. 

다른 종류의 남자들이 그들을 발견한 해변에 살아있었다.NK, 다시 싸우기 위해. [대한민국, 1950년 12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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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한 해병은 전우들의 도움과 위로를 받는다. 한국,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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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너드 헤이워스] "자신이 나온 신문을 보는 레너드, 

다음 날 새벽, 북한 저격수가 해병대 기관총 사수 레너드 헤이워스 상병의 미간에에 총을 쐈다. [한국, 1950년 9월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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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엾은 노인들! 또 전쟁인데 저들은 모를 거야 그들은 아마 이것이 또 다른 여름날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짐도 없고, 침구도 없고, 저녁 식사도 없다. 

오직 끄는 아들만 있고, 아들이 돌아오면 행운이 찾아올 수 있는 여행을 떠밀어주는 이웃이 있다. [대한민국 195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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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가 들판으로 조준사격을 하고, 아래 제방을 따라 도망치는 그늘진 형체들을 보고도, 

처음에는 그들을 무시한 남자들에게 몸을 고정시키고, 자신들만의 작은 여우굴을 파헤치고, 그들의 아기에게 맞게 헬멧을 능숙하게 고쳐 쓰는 어린아이들이 그들 사이에 나타났다. 그 누구도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혹은 나중에 그 중대가 언덕에서 내려와 서울을 공격한 후, 그들이 언덕 위에 올라가서 총소리에 귀를 막고 있는 동안 그들은 그 중대의 일원이었고, 그리고 환영한다. [대한민국, 195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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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이 배에서 일어나 수류탄을 던진 후, [그리고] 무릎을 꿇었다. [한국, 195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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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환자, 1950년 7월. 그녀의 두 아들은 북한군이 쏜 같은 포탄 폭발로 방금 사망했다." 사진 의료용 Verso에 새겨진 글

 

"626 고지의 계곡에서 한국군 위생병이 한 한국여성을 치료하고 있었다. 머리에서 파편을 뽑아내는 동안 아기는 무심코 젖을 빨고 있었다. 이웃사람이 다가가서 무엇인가 말을 하자 여자는 얼굴을 돌렸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그녀는 포탄을 맞은 아들이 숨을 거뒀다는 얘기를 들은 것이다." 더글러스 던컨, 195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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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북한의 서울 공격이 있은 지 불과 5일 만에 미군 제트기가 밭에서 일하는 농민들 위를 날고 있다. 195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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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의 뒷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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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경계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동안 해병들은 그저 반쯤 웃고 두려움에 떨지 않는 조용한 사람들이 그들이 할 수 있을 때 그들을 돕는 사람들을 찾는 것을 볼 때 그들의 행운을 축복한다. 만약 그들이 단지 부상당한 것을 발견한다면, 그들은 다시 한번 돌아가기 전에 그를 언덕에서 옮기기 위해 아이들처럼 각각을 들어올린다, 1950년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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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에서 탈출한 한 소녀가 젊은 해병에게 잠시 손인사를 한 뒤 달아난다. 대한민국 서울, 195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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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2월 "미군 제복을 입은 새디스트"가 북한 흥남의 민가를 불도저로 통과한 후 남은 모든 잔해 가운데 길을 잃고 당황한 한 한국 소년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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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미군, 연합군, 그리고 또 다른 9만 3천 명의 북한 민간인들이 대피한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흥남은 내장을 찢고 폭파되었다, 195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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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미군, 연합군, 그리고 또 다른 9만 3천 명의 북한 민간인들이 대피한 후, 부두를 따라 남은 것은 개 몇 마리뿐이었다. 195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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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흥남에서 철수한 뒤 부두를  폭파했다. 한때 항구였던 것이 산산조각이 난 헐크로 남았다. 195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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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열차에서 외곽까지 덥고 습한 행진을 하는 동안 해병대원 한 명이 드문 나무 그늘에 몸을 뻗고 있습니다. 한국,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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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2월 23일 한국 흥남 부두에서 데이비드 던컨(오른쪽에서 두 번째)과 다른 사진작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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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칼 마이던스와 데이비드 더글러스 던컨,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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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25전쟁 당시 장진호에서 참혹한 퇴각 중 미군 해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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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병 VMF-323 전투비행대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5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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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의 크리스마스 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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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이런 비극이 이 땅에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