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당시 이탈리아군을 한게 아 무것도 없는 국가로 인식 하곤 합니다!

이탈리아군 역시 2차대전당시 활약상이 상당합니다.

 





 





1936년 이태리 정부는  육군에 대대급 공수부대의 창설을 결정했다. 이 시기를 전후해 서방세계는 낙하산으로 투하되는 전투병부대에 대해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태리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육군의 공수부대 창설결정에 즈음해 이태리 공군 역시 소규모 낙하산병 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하늘에 관한 것이라면 공군이 더 전문가라는 자존심 문제도 한 몫했다고 본다. (그러나 이태리 정부의 최초 동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규모 전술강하가 아닌, 사보타주같은 후방교란작전을 담당할 소규모 병력의 낙하였다.)

 

 

그러나 이태리 군에서 본격적인 공수부대가 창설된 것은  정작  이태리령 리비아에서 였다. 당시 리비아령 이태리 총독이자 공군원수인 "이탈로 발보" 장군이 리비아 현지,"카스텔 베니토"에 이태리군 최초의 낙하산병학교를 세우고  부대를 창설한 것이다.  하지만, 최초의 훈련병은 대부분 이태리인이 아닌, 리비아인이었다.  이태리령 리비아의 식민지 부대에 배속된 2개 리비아인 대대가 공수훈련을 받은 것이다.  물론 이들을 지휘할 장교들은 육군과 공군에서 뽑은 이태리인 장교들 이었다.

 

 

1940년, 이태리 육군은 리비아"카스텔베니토"의 참모진을 중심으로 본토 "타르퀴니아"에 낙하산병학교를 창설했고, 본격적인 이태리 정규공수부대의 창설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훈련프로그램의 진행은 상당히 더뎠다. 문제는 이태리군에 지급된 국산 낙하산의 품질이었다. 기술적 문제로 낙하산 훈련병의 사망사고가 일어나면서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그러나, 낙하산 품질같은 문제는 일단 접어두고 "낙하산병"의 훈련은 계속 진행되었다.  그 결과 정규육군 낙하산부대 2개 대대와 "국가헌병대-카라비니에리" 소속 1개 공수중대가 창설되었다.  1941년 문제의 "이태리제 낙하산"이 "독일제 낙하산"으로 교체되면서 훈련과정 진행도 탄력이 붙었다.

 

이태리 군의 공수부대는 원칙적으로 "지원자"로 충당되었으며,  지휘관인 "부사관과 초급장교"에 관해서는 가급적 이태리 육군의 해당되는 모든 인력이 공수부대경력을 갖도록 만드는게 이태리 육군의 방침이었다. 이는 이태리군의 약점으로 평가받는 "소규모 부대 지휘술"을 강화하는데 공수부대의 훈련과 경험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이태리 육군은 1941년 9월 1일, 1개 공수사단을 완편했다.  이 부대는 제1공수사단"폴고레"로 명명되었고,  이어 제2공수사단"넴보"의 창설이 추진되었다. 하지만 이를 위해 폴고레 공수사단의 1개 연대가 유용되었으나 제2공수사단의 창설이 더디게 진행되면서 이미 완편된 제1공수사단"폴고레"의 병력부족이 악회되어 훗날 북아프리카 전투에서  고전하게되는 원인이 되었다.

 

 

한편 이태리 공수부대는  완전한 사단편제를 갖추기 전에 이미 실전에 투입되기 시작했다. 

1941년 4월, 소규모 이태리 공정부대가  그리스 해안의 "잔테","체팔로니아" 등의 섬에 전투강하임무를 수행했고,  영국령 사이프러스의 습격작전에도 투입되었다.

 

이태리 군당국의 희망은 이들 공정부대를 확대강화시켜  수에즈운하나 이태리령 동아프리카에 공중투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인 과제는 곧 있을 "말타"섬에 대한 독-이 연합작전인 "헤라클레스"의 성공적인 수행이었다. 이를 위해 이태리 공수부대들이 이미 독일공수부대와 합동훈련 중이었다.

 

C3작전, 즉 이태리측 말타 침공작전이 차일피일 미루어 지다가 1942년 6월, 결국 무산되어 버리자,  이태리 군 당국은 7월 14일자로 폴고레 공수사단을 북아프리카로 파병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북아프리카의 전황을 고려해 이태리군은 평소와 달리 신속하게 이들을 현지에 공수하는데 성공했다.

 

1942년 7월 27일,

폴고레 공수사단은 현지에서 "제 185 카시아토리 드 아프리카 보병사단"으로 개칭되었다.  대충말해서 아프리카 엽병(사냥꾼)사단이라는 의미인데, 대강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퓨질리어"라고 부르는 경보병사단으로 보면될 것이다.  그러나 이 공식적인 명칭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자료에서는 "제185 폴고레 공수여단"  으로 부르고 있다.

 

 

 

 

왜 보병사단이라는 공식명칭임에도 여단이라고 불리고 있을까?

거기엔 슬픈 사연이 있었다.  아프리카에 파견된 폴고레 공수사단은 전체정원이 아니었다. 아니, 한 참 모자랐다.우선, 1개 공수연대가 제2공수사단"넴보"의 창설을 위해 유용된 것이다,  유용된 이 부대는 제184 공수연대로 개칭되었다.

 

문제는 나머지 부대들인데.... 북아프리카의 폴고레 공수사단은 총7개의 완편되지 못한 공수대대로 겨우 운영되었던 것이다.

 

 

부대는 제186 공수연대 예하 제5,6 공수대대, 제187공수연대 예하 제2,4,9,10 공수대대, 독립편성된 제7공수대대, 그리고 1개 강하전투공병대대 1개가  이들로 대략 3000~3500명 수준에 불과했다. 그것도 대다수가 정원을 완전히 채우지 못한 상태였다.

 

특히, 제 2공수대대는 겨우 2개 낙하산 중대만이 북아프리카에 보낼 수 있는 상태였고, 제3공수대대는 여전히 본토 타르퀴니아의 낙하산병 교육센터에서 교육중이었다. 게다가 사단예하 제185공수포병연대는 47미리 대전차포 3개 중대, 제20 박격포중대는 81미리 박격포 소대 2개가 전부였다.  그래서 공수부대원들은 부족한 정원을 화력으로 메꾸기 위해서  배정된 정수보다 훨씬 많은 수의 자동화기를 확보해서 아프리카로 떠났다.

 

 

 

 

 

현지에서는 이들에게 타 부대의 병력을 뽑아서 인원보충을 시켜주었다.

우선"귀아스타토리"라고 불리는 전투공병대대와 "파비아"사단의 보병대대와 포병대대가 1개씩 배속되었고, "브레시아"사단에서도 1개 포병중대가 파견되었다. "아리에테"기갑사단에서는 88미리 대전차 포병중대 1개, 제5베르사글리에리대대에서는 대전차 포병중대1개, 동맹국 독일의 제21기갑사단에서는 전차 1개 소대가 배속되었다.

 

하지만, 여러부대에서 모인 잡탕 부대들이 결속력이 강할리 없고, 이는 전투 중  문제점으로 드러났다.

 

 

사실, 오늘의 주인공"폴고레 공수사단"의 하이라이트는 "알라메인 전투"다.

 

하지만, 폴고레의 전투는 이미 그 이전에 시작되었다. 1942년 9월, 그러니까 알라메인전투가 시작되기 한 달전에 벌어진 영국군의 "브레스포드"공세  당시 영국군 제131보병여단과 전장에서 격돌한 것이다. 폴고레 공수부대는 엄청난 손실에도 불구하고 영국군 보병여단을 격퇴하는데 성공했으며 적에게 자신이 입은 피해의 10배로 갚아 주었지만, 당시 전투의 주역이었던 예하 제10공수대대는 결국 재편성되어 제9공수대대에 흡수되고 말았다.

 

폴고레 공수사단이 이 지경임에도 추축군 사령부는 폴고레 공수사단에게  정규사단급 "섹터"를 방어구역으로 할당했다.






1942년 10월 23일 영국군의 알라메인 공세가 시작되었을때,  폴고레 공수사단의 정면에는 연합군 부대들이 떼로 밀려들었다.

영국군 제44,50보병사단과 제7기갑사단, 자유프랑스제1사단, 그리스여단 등이 이들로 병력과 장비 면에서 이태리 수비대는 도저히 이들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이게 엘 알라메인 전투당시 북아프리카의 지도입니다.보시면 연합군들이 다굴(?)때리고있는곳에 위치한부대가 바로 폴고레 공수사단입니다.

사단장"엔리코 프라티니" 장군..

허접한 이태리군치고는 나름 용장이다. 하지만 전투는 1개사단이 혼자하는게 아니다!

 

 

당시, 폴고레 공수사단은 "엔리코 프라티니" 장군의 지휘하에 있었는데, 장군은 만성적인 병력과 장비부족을 만회하기 위해서 "독특한ㅡ그러나 위험한" 전술을 쓰기로 결정했다.

 

프라티니 장군은 사단화력의 대부분을 제2방어선으로 돌리고, 적에게 제1방어선은 손쉽게 돌파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제1방어선 주변에 잘 위장된 개인호를 설치하고 그곳에  "대전차팀"을 매복시켰다.   적 전차대가 제1방어선을 돌파하면, 대전차팀이 방어선을 지나친 적전차의 후미를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자기지뢰"와 "몰로토프칵테일(화염병)"으로 무장한 결사대의 돌격공격도 포함되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연합군의 전차대는 쾌속전진하며 폴고레 공수사단의 제1방어선을 돌파했지만, 그 댓가는 참담했다.  폴고레 공수사단의 사단일지에는 23일 당일에만 연합군 전차 110대를 격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는 과장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확인된 수치 역시 전차 31대가 그날 격파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물론 이태리 군의 변칙전술에 당황한 연합군은 폴고레의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실패했다.  (폴고레 공수사단이 격파한 110여대의 전차는 아마도 이 부대가 알라메인에서 작전하는 동안 전체 전과에 해당된다고 보는게 맞을 것같다)







이 날의 대승에도 불구하고, 사단장인 프라티니 장군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사단장은 예하 전투공병들이 방어선 정면에 주저앉은 연합군 전차를 완전히 파괴해 버리지 않은데 대해 불같이 화를 냈다. 아마도 방치된 적전차로 인해서 전투지정면의 시야가 가린다고 판단했거나  아직 기동가능한 전차가 반격해 올지도 모른다고 판단했을지는 모르겠다.

게다가 사단장은  전투에서 사단에 배속된 독일군전차소대의 비겁한 행태에 대해 분노했다.  독일 제21기갑사단에서 파견나온 전차소대는 평소 상전처럼 군림하던 행태와는 달리 전투에서는 "쥐새끼"처럼 겁을 집어먹었다고 프라티니 장군은 매우 불쾌해했다.

 

이후, 연합군의 공세가 3일동안 이어졌지만, 폴고레 공수사단의 방어라인은 뚫리지 않았다.

 

 

1942년 11월 11일자 런던의 전시방송에서는 이 이태리군 공수부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폴고레 공수부대의 생존자들은 이미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서

 

우리에게 저항하고 있다.

 

 

이렇게되자 몽고메리는 병력을 뽑아 반대편으로 우회공격을 가했고, 거기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1월 2일,

폴고레 공수사단은 철수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이는 사실상 버려졌다고 보는게 옳을 것이다.

자체 수송차량이 부족했던 폴고레 사단은 도보로 후퇴해야 했고, 이내 연합군의 포위망에 갇히게 되었다.  사단은 필사적인 돌파작전으로 이태리령 리비아로의 철수작전을 수행했지만, 결국 11월 6일 "푸카" 입구에서 연합군에 항복했다.   사단은 이미 식량,식수는 물론이고, 탄약까지 바닥난 상태였다.

 

이들을 상대한 영국군은  감투정신을 발휘한 폴고레 공수사단에게 이례적으로 무기를 보유한채 항복할 수 있도록 배려했으며, 백기를 내걸지 않아도 되도록 허락해 주었다.   결국 소수의 사단병력만이  포위망을 뚫고 리비아로 탈출에 성공했다.  이들은 재편성후 "제285 폴고레 공수대대"라는 이름으로 "튀니지" 전투에 참가했다.


 

 



폴고레 공수사단은 연합군의 알라메인 공세에서  총120여대의 전차를 격파하고 3000여명의 인명손실을 입혔다. 그 대가로 공수사단은 정원 3500명 중 1100명을 잃었다.  폴고레 공수사단은 혁혁한 무공을 인정받아 현 이태리 군에서도 여단급 편제로 운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