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군의 공세

 


 

 

1.쿠르스크 북부 전선 - 독일군의 초기 공세


7월 5일 오전 5시 30분, 포병의 사격을 등에 업고 독일 9군이 소련 13군의 정면을 향해 공세를 시작했다. 9군 사령관 발터 모델 상급대장은 두터운 소련군의 방어진지를 돌파하기 위해 6항공군에 폭격을 요청했고, 독일 공군이 제공권을 완벽하게 장악하면 기갑부대를 선두로 손쉽게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1943년의 소련 공군은 독일 공군이 무시할 상대가 아니었다. Ju 87 급강하 폭격기의 맹폭이 채 끝나기도 전에 400여 대의 소련군 전투기가 독일군을 향해 접근했고 곧바로 항공전이 시작됐다. 비록 독일 공군이 여전히 개별 기체의 성능과 조종사의 기량에서 우세를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우세는 소련 공군의 수적 우세에 의해서 극복될 수 있을만큼 소련 공군의 기량 또한 성장해있었고 예전처럼 일방적으로 제공권을 장악할 수 없었다. 결국 방어선 정면을 향해 돌격하던 독일군 23군단과 47기갑군단은 엄청난 숫자의 대전차 호와 강철 피아노 줄 지뢰와 기관총 진지가 끝없이 배치된 방어선을 돌파하는 동안 눈에 띄게 전투력이 감소하고 있었다.

한편 독일 23군단과 47기갑군단이 소련군의 저항에 막혀 고전하는 사이 41기갑군단과 46기갑군단이 각각 소련군 방어선의 우익과 좌익을 압박하며 진격을 시작했다. 41기갑군단은 성공적인 진격을 계속해 우익을 방어하던 소련 81보병사단을 격파했으나 신속한 소련군의 증원에 저지 당하며 진군을 멈췄고, 46기갑군단은 소련 15보병사단과 132보병사단을 격파하며 포니리를 향해 맹렬하게 진격하기 시작했다. 46기갑군단의 맹공에 방어선이 뚫리기 시작한 소련군은 2개 보병사단을 추가로 투입하며 필사적인 방어를 시작했으나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방어선은 돌파 당하고 말았다. 독일군은 힘겨운 사투 끝에 소련군 제1방어선을 돌파하고 포니리 북쪽에 교두보를 마련하는 데 성공했지만 도저히 승리라 부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중부집단군 대부분의 기갑 전력을 일거에 투입 했음에도 하루 내내 겨우 6.5km를 전진했을 뿐이었고, 투입된 전력의 거의 20%를 상실하고 있었다.

 

2. 쿠르스크 북부 전선 - 포니리 공방전

 

 7월 6일 새벽에 독일군을 향해 가해진 소련군의 반격을 완벽하게 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소련군의 2차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한 채 진격이 저지당하고 말았다. 소련군은 거의 300여 대의 전차를 상실하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방어선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다급해진 모델 원수는 7월7일 가용 가능한 모든 기갑 전력을 끌어모아 400여 대의 전차와 10개 보병사단을 동원해 포니리와 올호바트카를 잇는 철도선에 공세를 개시했다. 포니리와 올호바트카는 오렐과 쿠르스크를 잇는 철도선의 중심으로, 이곳을 점령하지 못한다면 쿠르스크 북부 전선의 공세는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는 것과 다름없는 요충지였기에 독일군과 소련군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지역이었다.

불과 10km 정도에 불과한 전선에서 양군 합계 40만에 가까운 대 병력이 충돌하는, 역사상 유례가 없던 전투가 벌어졌다. 독일군은 폭격기와 전차를 동원해 맹공을 펼쳤지만 소련군의 격렬한 방어에 저지당하기 시작했다. 독일군의 공세는 날이 바뀐 7월 8일에도 계속돼 필사적으로 돌파를 시도했지만 강철 같은 소련군의 방어 진지는 도저히 무너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중구축전차 페르디난트도 2개 대대 90대가 투입되었고 원거리 전차전에서 압도적인 능력을 보였으나 야지기동시 엔진 과부하 및 지뢰로 절반가량이 손실된 것은 덤이다. 그런 와중에도 소련군의 병력은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계속 증강되고 있었고, 독일군은 압도적인 교환비를 보여주며 선전하고 있었지만 전력 차이는 오히려 점점 더 벌어지고 있었다. 불과 3일 만에 쿠르스크 북부 전선 독일군의 공세는 한계에 이르고 만 것이다.

7월 8일 저녁, 모델 대장은 야전 작전 회의에서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소련군의 방어선은 그야말로 강철 같았고, 믿었던 공군마저 제공권 장악에 실패하고 있는 상황에서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한다는 것은 극히 힘든 일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중부집단군 사령관 클루게 원수는 모델 대장에게 공격을 계속할 것을 명령했고, 모델 대장은 지쳐가는 병력을 다닥다닥 긁어 모아 다음날 공세를 재개했지만 결국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7월 10일 모델 대장은 중부집단군에 강력한 소련군의 방어선을 향해 공격하는 것은 무의미한 소모전만을 강요당할 뿐이며, 획기적인 전술적 보완이 있거나 공세를 유지할 만한 전력이 보충되지 않는 이상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보고했다. 히틀러는 공세를 계속할 것을 명령했지만 모델은 더 이상의 공세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판단, 휘하 부대에게 휴식을 명령하고 공세를 중단했다.

하지만 폰 클루게 원수는 아직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2개 사단을 보충하여 7월 11일 밤에 올호바트카를 점령하기 위해 야습을 가하기로 결정하고, 소련 70군을 향해 11일 밤 공세를 시작했지만 이 역시도 저지당하고 말았다. 이제 공세를 가할 힘을 완전히 상실한 독일 9군은 완벽히 한계에 이르고 말았다. 성채 작전이 시작된 지 불과 5일 만에 쿠르스크 북부 전선의 공세는 실패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3. 쿠르스크 남부 전선 - 독일군의 초기 공세


쿠르스크 남부 전선에서도 만슈타인이 지휘하는 남부집단군의 7월 5일 일제 공세가 시작됐다. 독일군은 남부 전선의 초기 공세는 북부 전선에 비해 성공적으로 진행될 것이라 예상했는데, 이는 소련군이 독일 중부집단군을 공세의 주공으로 판단, 남부 전선에 비해 더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한 탓도 있긴 하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독일 남부집단군은 1600여 대의 전차 및 자주포를 장비해 북부 전선의 중부집단군에 비해 월등한 타격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독일 남부 집단군의 주공은 4기갑군 예하 48장갑군단으로, 독일 국방군 최정예 부대인 그로스도이칠란트(GD)사단과 제3, 제11기갑사단 및 최신예 전차인 판터를 무려 200대나 장비한 10기갑여단을 예하에 두고 막강한 기갑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독일 남부집단군은 48기갑군단이 파울 하우서의 제2SS기갑군단과 함께 보로네즈 전선군의 정면을 강타함과 동시에, 베르너 켐프 중장의 켐프 분견군이 도네츠 강 동쪽에서 공격을 가하며 일제 공세를 시작했다.

하지만 48기갑군단의 공세는 당초 기대와는 다르게 난관에 봉착하고 있었다. 4기갑군 사령관 헤르만 호트 대장은 10기갑여단의 판터 200대를 GD사단에 배속시켜 선봉에 설 것을 명령했는데, 이러한 조치로 GD사단은 350대의 전차 및 돌격포를 장비한 막강한 타격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GD사단의 이러한 기갑 전력은 무장SS 2기갑군단의 전체 기갑 전력과 맞먹는 것으로, 독일군은 소련군이 GD사단을 저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 판단했다. GD사단은 3기갑사단과 11기갑사단이 측면을 엄호하며 보로네즈 전선군의 정면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GD사단은 소련 67근위소총사단과 3기계화군단의 강력한 저지선에 가로막혔고, 소련 공군 전폭기의 폭격에 피해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판터 전차의 기계적 결함으로 인해 고장이 속출하면서 전체 판터의 거의 1/3이 기동 불가능 상태가 되는 불운까지 겹쳤다. 또한 GD사단의 대규모 전차를 통제하기위한 10기갑여단의 임무도 GD전차연대장의 비협조, 판터의 기계고장에 따른 불신이 겹쳐 유명무실화 되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측면의 3기갑사단이 소련군의 저지선을 돌파하며 성공적으로 진격했고, 이에 힘입어 48기갑군단은 적의 제1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하긴 했지만 각 부대들이 입은 피해는 예상치를 훨씬 뛰어넘었다. 이렇게 독일 남부 집단군의 주공이었던 48기갑군단의 이렇게 꺾여가면서 쿠르스크 남부 전선의 공세 또한 초반부터 사실상 실패나 다름없는 상태로 빠져들고 있었다.
  

4. 쿠르스크 남부 전선 - 제2SS기갑군단의 약진


한편 제2SS기갑군단은 48기갑군단에 비해 한결 성공적인 진격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48기갑군단의 우익을 엄호하며 공격을 시작한 제2SS기갑군단은 소련 6근위군의 방어선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며 오보얀-쿠르스크를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만약 6근위군의 방어선이 완전히 무너지고 켐프 분견군이 도네츠 강을 따라 계속 진격하여 독일 4기갑군과 합류하게 된다면, 쿠르스크 남부 전선은 전면적으로 붕괴될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었기에 보로네즈 전선군 사령관 바투틴 대장은 곧바로 증원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방어선의 곳곳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했고, 7월 7일에는 이틀만에 쿠르스크 방어지대의 핵심지역인 '쿠르스크-오보얀 도로'를 향해 20마일(30km)이나 전진하였다. 그러나 이날을 기점으로 제2SS기갑군단은 점점 힘에 부쳤고, 결국 소련 제1전차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7월 9일, 호트의 4기갑군은 기갑사단을 한데 모아 전선에 뚫고 나아가, 토텐코프 사단을 선두로 하는 독일군과 쿠르스크 사이에 있는 마지막 장애물인 프숄 강을 뚫고 제3SS기갑사단 토텐코프는 참호를 파 들어갔다. 하지만 이후로 북서쪽인 쿠르스크쪽으로 진격은 더이상 불가능해졌다. 


5. 쿠르스크 남부 전선 - 프로호로프카 대(大)전차전



이어 두 부대가 만났을 때, 양 편의 병사들은 좁은 차창을 통해 적군의 규모를 확인하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사방이 구릉지였기 때문에 돌아갈 곳도 없었다. 거대한 두 부대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고, 이로써 희대의 대전차전이 시작되었다.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1,500대가 넘는 전차가 뒤엉킨 전투는 없었다. 게다가 이 전투에는 그 어떤 계획된 전술도, 일관된 지시도 없었다. 양측의 전차는 서로의 위에 올라타기도 하고, 파괴하고 파괴당하는 악전고투를 겪었다. 한 목격자는 전장이 너무 비좁아보였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8시간에 걸친 맹렬한 전투 끝에 두 부대는 서서히 뒤로 물러나 전열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소련은 300여대의 전차를 남겨둔 채 퇴각했고, 독일 역시 비슷한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소련은 신속하게 전차를 보강한 반면, 독일에게는 그럴 여력이 없었다.
- 영국 크롬웰 프로덕션, '2차대전사' - <독일 육군의 선봉, 기갑부대> 편

프로호로프카에서는 모두가 각자의 직사 거리 안에 있었어요. 만약 한 전차가 당신을 놓친다고 해도, 바로 다음 녀석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대략 700대 가량의 전차가 있었어요. 적들도 비슷했죠. 그러니까 거기에 총 1500대의 전차가 있었다는 거에요. 상상이 됩니까? 1500대라구요. 우리는 24시간 동안 싸웠지만 고작 5~7km를 전진했어요. 전차들은 서로 밀어내고 밀렸죠. (중략) 그건 전술이나 뭐 그런게 아니었어요. 그건 그냥 야만적인 살육이었죠. 모든 것이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악취와 연기는 끔찍했습니다. 연기로 둘러싸여 마치 저녁처럼 어두컴컴했습니다. 전차나 다른 차량들은 불타고 있었고, 덕분에 서로간의 소통은 전혀 되지 않았죠. 무선통신도 먹통이었습니다.
- 소련군 참전 용사의 증언


결국 호트는 주력 공세를 북동쪽의 작은 철도 교차점인 프로호로프카로 돌렸다. 7월 9일부터 14일까지가 쿠르스크 공세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무장친위대 기갑사단들(제1 SS기갑사단 라이프슈탄다르테 아돌프 히틀러 (LSSAH), 제2 SS기갑사단 다스 라이히, 제3 SS기갑사단 토텐코프)들을 앞세운 독일기갑부대는 소련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히고 500대 가 넘는 중전차를 굴리며 진격하였다. 이에 7월 6일에 스탈린은 제5근위전차군 사령관 파벨 로트미스트로프 장군에게 생일 축하 겸 손수 전화를 하면서, 그에게 귀중한 예비 병력의 일부를 주고 프로호르프카를 지키라고 하였다. 7월 7일 오전 1시 30분, 소련 5근위전차군은 사흘간 370km(230마일)이 넘는 거리를 독일의 Ju87 급강하 폭격기와 맞닥트리며 밤낮으로 행군하여 7월 10일에 전선에 도착하였다. 사실 이 정도 거리는 원래 기차로 이동을 해야 정상인데 전차가 직접 주행한 탓에 승무원이나 기계에 많은 무리를 줬으나 사기는 왕성했다.

주코프는 로트미스트로프에게 T-34가 5호 전차 판터와 6호 전차 티거에게 화력에서는 제압당하지만 기동성이 앞서니 '기계화 부대의 백병전'을 하라고 지시하였다. 7월 12일 아침, 294대 가량의 독일군 전차와 790여대의 소련군 전차가 대치했다. 이는 독소전쟁 최대의 전차전이었으며 단일 전투로서는 역사상 최대의 항공전이었다. 이는 향후 성채작전의 결과, 그리고 더 나아가 독일의 동부전선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전투였다.

아침 7시, 대규모의 독일 폭격기 부대가 소련군 진영을 맹렬히 폭격하였고 이에 맞서 소련 전투기들이 출격하였다. 폭격기들이 돌아간 후, 소련군은 SS기갑군의 머리 위로 쉬지 않고 폭탄과 로켓을 투하하였다. 오전 8시 30분, 로트미스트로프는 강철이란 뜻의 '스탈'이라는 암호로 공격 명령을 내리고, 곧이어 독일 쪽에서도 LSSAH의 전차들이 몰려나왔다.

이 날, 겨우 3제곱 킬로미터에 불과한 지역에 수백대의 전차가 뒤엉켰다. 소련군 전차들은 독일군 기갑부대를 타격하기 위해 들이받으면서 포화를 퍼부었으며 독일군 전차들은 기동불능이 되면 문을 걸어 잠그고 마지막까지 포화를 쏟아부었다. 양측은 전투불능이 되면 밖으로 나와 상대편의 전차에 유탄을 던지는 등 전투는 매우 치열하고 혼란스러웠다.

이 단일전투에서 약 700대 이상의 전차가 파괴되었고, 대부분은 소련군 전차였다. 독일군은 더 이상 결정적인 진격이 불가능해졌고, 소련군은 방어에는 성공했지만 전진이 전혀 불가능하였다. 다음날도 계속 전투가 진행되었지만 이는 소규모에 불과했으며, 독일군의 진격은 바투틴과 바실레프스키의 재빠른 방어에 번번이 좌절되었다. 그러나 7월 13일, 로트미스트로프에게는 5근위군 등에서 증원군이 계속 도착하긴 했지만 5근위 전차단의 기동 가능한 전차의 수는 50대 밖에 없었고 병력은 반으로 줄어있었다.

이 전투의 결과만 따져 봤을때는 독일 기갑군의 전술적 승리에 가깝지만, 독일군은 이 전투에서 입은 손실로 인해 소련군의 돌출부를 제거하려는 최초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게 되었으니 전략적으로는 소련의 승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규모의 전차전은 이전까지도 그 이후로도 없었다. 는 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이야기였지만 일각에서는 프로호로프카 전투가 부풀려진 전투라는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6. 독일군 공세 종료

7월 10일, 서방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하면서 히틀러는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귀중한 병력을 남부로 돌릴 수 밖에 없었다. 7월 13일, 성채작전은 공식적으로 취소되었고, 2SS기갑군단은 이탈리아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호트 장군을 비롯한 휘하 장군에게는 성채작전 이전의 방어선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만슈타인 원수는 작전을 계속할 것을 주장했지만, 이미 다른 곳으로 돌려진 히틀러의 관심을 되돌릴 수 없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히틀러의 공세 중지 결정은 이탈리아의 연합국 상륙보다는 소련군의 쿠투조프 작전으로 인하여 돌출부가 남부 집단군 전력만으로 돌출부를 끊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신장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이 설이 정설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만슈타인 주장대로 공세를 지속했으면 역시나 발리는 쪽은 독일군이였다.왜냐면 스텝 예비군은 전투에 참가를 안해서 전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지만, 48 기갑군단과 SS 2기갑군단은 이미 지속적인 전투로 인해 만신창이와 전투 피로가 쌓일데로 쌓여서 이대로 공세를 유지했다가는 군단 자체가 와해되는 결말 밖에 없다.

결국 독일군의 쿠르스크 공세는 7월 15일에 끝났으며 이탈리아의 상황이 급박해지자 히틀러는 8월 1일 동부전선의 길이를 단축하여 유럽으로 돌릴 병력을 확보하기 위해 오룔 돌출부로부터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쿠르스크 북부 전선 - 쿠투조프 작전


7월 12일, 쿠르스크 북쪽에서는 오룔(오렐이라고도 한다.)과 브랸스크를 탈환하여 독일 중부 집단군을 무너트릴 계획으로 쿠투조프 작전이 개시되어 독일 9군의 후방을 위협했다. 처음에 3개군으로 공격을 시작했던 서부 전선군과 브랸스크 전선군은 작전 초기엔 독일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전진이 힘들었지만, 추가로 3개군을 더 투입하여 독일군의 한쪽이 뚫리면서 소련군은 물밀듯이 쳐들어가 8월 5일에 오룔이 함락되고, 8월 18일에는 브랸스크 시가 소련의 손에 들어갔다.

하지만 독일군은 얌전하게 후퇴하지 않았다. 7월 12일부터 8월 18일까지 38일 동안, 독일군 49만 2천명을 섬멸하기 위해 소련군 128만 2천명이 투입된 상황에서 독일군은 사상자 60,804명, 전차 손실 250대를 기록한 반면 소련군은 사상자 429,890명, 전차 손실 2,586대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만 했고, 거기에 독일군은 특히 소련군 포로 11,732명까지 데리고 하겐 라인으로 무사히 퇴각한다. 클루게와 모델은 쿠르스크 방면의 공세를 준비하면서도 오렐 전투를 예상하여 방어에 용이한 예비 전투 지구를 확보해 두었고, 9군 사령관 모델이 제2기갑군의 사령관을 겸임하며 지휘 체계를 통일시켰다. 결과적으로 중부집단군은 퇴각했음에도 5개 기갑사단을 비롯한 19개 사단의 전력을 보존하여 가용 병력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쿠르스크 남부 전선 - 루미안체프 작전


쿠르스크 남쪽에서의 반격은 한참 후인 8월 3일에 주코프 장군의 직접적인 지휘 아래 개시되었다. 이 작전의 이름은 루미안체프 작전으로, 목표는 하르코프의 탈환이었다. 이 공격은 주로 쿠르스크 후방에 있던 이반 코네프의 초원(스텝) 예비 전선군에 의해 이루어졌다.

만슈타인의 독일군 기갑부대가 자리를 잠시 비운 직후인, 8월 3일 주코프가 보르네즈 전선군과 스텝 예비 전선군, 그리고 남서부전선군의 우익을 동원해 반격 작전을 개시하자 독일군은 완전히 허를 찔리게 되어 소련군이 결국 8월 5일에 벨고로드 시를 점령하게 되었다, 이후 중부집단군으로 부터 차출된 증원부대와 루미안체프 작전 저지를 위해 파견된 기갑부대 일부가 서둘러 돌아오면서 독일군은 일시적으로 소련군을 저지하였다.

히틀러는 어떻게든 하르코프와 도네츠강 유역만은 지키고 싶어 했지만 8월 7일에 서부전선군과 칼리닌 전선군의 좌익은 11개군과 기타 군소대를 동원해 스몰렌스크 방면으로 나가기 시작했고, 8월 13일 마침내 스텝전선군이 하르코프에 돌입하여 10일간 치열한 시가전 끝에 8월 23일에는 하르코프 시도 점령함으로써 독일군은 도네츠강 유역을 포기하고 드네프르강 서쪽으로 후퇴함으로써 쿠르스크 전투는 막을 내리게 된다.
 
 

결과


비록 소련군의 병력 손실은 독일보다 훨씬 많아서 인명피해가 독일의 4배가 되었고, 전차 같은 경우는 독일군에 비해 거의 7배의 손실을 입는 등 막대한 손실을 입었음에도 승리는 소련의 것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모든 전쟁사가의 견해가 일치한다. 만슈타인 역시 후에 자신의 회고록 《잃어버린 승리》에서 작전이 잘 안 풀렸던 상황은 인정했다.

이후 독일은 이탈리아에 서방 연합군이 상륙했기 때문에 더 이상 동부전선의 소련군만 상대할 수 없었고, 전력의 상당부분을 서부전선에 할애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1944년 중반까지는 서유럽 전체의 공업지대(+추축국을 도왔던 중립국 스웨덴)와 자원을 모두 사용할 수 있었던 나치독일이 소련보다 훨씬 더 많은 자원이나 공업력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나치독일은 이런 공업력조차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이는 독일에게 대단히 나쁜 소식이었다.

소련군도 쿠르스크 이후 반격부터 해서 드네프르강을 완전히 뚫어버리기까지 200만 명 가량의 사상자를 내는 막대한 인명손실을 얻었지만 1941년 독소전 직전 인구 2500만 명은 족히 넘던 드네프르강 서안 서부 우크라이나를 탈환해서 인구 밀집지대에서 징병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손실을 어느 정도 보충할 수 있을 것이었다.

군사적인 면만 본다면 동부전선 > 이탈리아가 맞기는 했다. 지형적으로 봐도 이탈리아 북부는 알프스 산맥으로 제대로 막혀있고 중부에도 아펜니노 산맥 + 많은 강들로 지연전을 펼칠 수 있기 때문에 어차피 뚫릴 이탈리아 남부로, 동부전선의 정예기갑 병력을 뺀 것은 아무리 봐도 전략적 미스다. 더군다나 위에서 언급한것처럼 드네프르 강이 뚫리고 서부 우크라이나를 스탈린이 확보하면 거기서 또 보충할 수 있는 규모도 상당할 것이며 이는 독일에게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편적인 견해일 뿐이다. 이탈리아는 1943년 연합국이 상륙하자마자 추축국의 대열을 빠르게 탈퇴했고, 이후 이탈리아 왕국은 연합국 편을 들어 독일군의 이탈리아 반도 축출을 거들었으므로 이탈리아의 중요성에 대한 히틀러의 판단은 그른 게 아니었다. 이 때문에 히틀러는 급히 이탈리아 국왕에 의해 체포된 무솔리니를 구출하여 괴뢰국인 살로 공화국을 만들어 이탈리아 북부를 맡겼다. 이탈리아 전선에서 알베르트 케셀링 원수가 연합국의 공세를 잘 막아냈고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문에 이탈리아 전선은 독일군과 연합국이 대치상태로 있다가 독일이 멸망해서 별로 중요성이 없다고 간주되곤 하지만, 만약 이탈리아가 통채로 연합국으로 넘어갔다면 멀리 있어서 도움 안되는 일본을 제외하면, 군사적으로 의미있는 추축국 중 가장 먼저 항복했다는 점에서 독일 국민이나 다른 추축국 루마니아, 헝가리, 핀란드, 크로아티아 등 지도자에게 줄 수 있는 충격은 상당했다. 즉, 이탈리아의 군사적 가치는 동부전선보다는 훨씬 낮았지만 추축국의 안정화를 위해 정치적으로는 상당히 중요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탈리아의 안정을 위해 작전을 취소한 히틀러의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보는건 근시안적인 견해다.  


독일군과 소련군의 전력 비교



독일군은 2개의 집단군으로 나눠 공격을 준비했다.

※남부집단군 = 2개군(제4기갑군과 캠프작전단)

  • 병력 : 보병 5개사단, 기갑 8개사단, 기계화보병 1개사단(병사 28만, 화포 2,500문, 전차-자주포 1,500대)

※중부집단군 = 제9군

  • 병력 : 보병 8개사단, 기갑 6개사단, 기계화보병 1개사단(병사 27만, 화포 3,500문, 전차-자주포 1,200대)

총합계 = 병사 90만, 화포-박격포 1만문, 전차-자주포 2,700대

소련군도 마찬가지로 2개 방면군으로 나눠 방어를 준비했다.

※보로네츠 방면군(적의 주공격이 예상되는 벨고로드지구)

  • 제6친위군, 제7친위군을 제1선, 제1전차군(제6, 제31전차군단, 제3기계화군단)을 제2선
  • 제69군을 코로챠 정면. 방면군예비, 제35친위저격군단, 제2, 제5친위전차군단

방면군 정면 114km 지대를 제6, 제7친위군이 담당. 남은 130km 정면을 제38, 제40군이 담당. 제2항공군이 작전을 지원한다.

※중앙방면군(포느이리방면을 중심으로 주 공격이 예상됨) 그 정면 95km에 집중적으로 배치한다.

  • 제1선을 제48,제13,제70군. 그 후방 제2선에 제2전차군(제3, 제16전차군단) 연장 200km의 정면에 해당하는 전선에 제65,제60군이 담당. 방면군예비,1개기병군단,2개전차군단(제9,제19). 제16항공군이 작전지원을 한다.

※총예비(스탭방면군) 전선후방 리브느이,스타-루이-오스콜의 선에 집결

  • 제5친위군, 제27, 제47, 제53군, 제1기계화군단, 제4친위전차군단, 제10전차군단, 3개친위기병군단. 제5항공군이 작전지원

병력-인원 57만, 화포 7,400문, 전차-자주포 1,500대(이 방면군의 전력은 통상의 예비개념이 아닌 총공격으로 전환시 제1선에 진출하여 공격의 주역을 담당할 전력으로 쓰이는것이 특색이다.)

총합계 = 병사 133만, 화포 2만문, 전차-자주포 3,600대, 항공기 3130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