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 독일군과 소련군은 완전히 동격이다. 우리만 할 수 있고, 그들이 할 수 없는 일은 한 가지도 없다.

― 독일 제6보병사단장 '호르스트 그로스만'


 

 

제2차 세계대전에서 1943년 7월부터 8월까지 쿠르스크 일대에서 벌어진 소련군과 독일군 간의 전투. 점차 소련군의 우세로 흘러가던 동부전선의 전세를 완전히 확인시킨 전투로서 이 전투에서 패배한 독일군은 동부 전선의 기갑전력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고,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게 된다.

이 전투의 일부인 프로호로프카 대(大)전차전은 사상 최대의 항공전이자 최대의 전차전이기도 하다. 또한 1달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단일 전선에서 양 군 합계 병력 약 200만, 전차 약 6,000대, 항공기 약 4,500대라는 가공할 전력이 충돌한 전투였다.

흔히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인류역사상 최대의 전투라고 알려져 있는데,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최대 규모의 사상자를 낸 전투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시가전이라는 특성상 보병 위주의 면대면 전투, 그리고 천왕성 작전으로 독일군을 역포위한 양상을 보였지 기갑과 항공 전력의 대규모 충돌은 없었다. 물론 두 전투 중 어느 전투가 더 거대했느냐는 논쟁의 대상이다. 또한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주도권 전환의 시작이라면, 이 전투는 소련군의 우위를 확인한 전투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중후반기였던 1943년 7월부터 8월까지 무더운 여름에 동부전선 쿠르스크 돌출부에서 나치 독일군과 공산주의 소련군이 격돌한 쿠르스크 전투는 소련군이 독일군을 물리치고 

승기를 잡아 독소전쟁의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킨 전환점으로 작용된 전투였다. 

또한 쿠르스크 전투는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차전이 벌어진 희대의 대전차전이었다. 

 그리고 이 전투는 단일 규모의 전투로도 가장 큰 전투 중 하나였다.

쿠르스크 전투로 인해  1달도 되지않는 기간 동안 단일 전선에서 독일과 소련 양 군 합계 병력 약 200만명 전차 약 6,000대, 항공기 약 5.000대라는 가공할 전력이 충돌했던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전투였다. 이 전투의 패배로 인해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 내리막길로 치달아 소련 군대에 항복하는날 까지 독일 본토로의 비참한 패주를 계속 하게 된다. 쿠르스크 전투는 독일군 뿐만 아니라 소련군에게도 극심한 전력 손실을 입혔다.그러한 예중 하나로  쿠르스크를 방어했던 로트미스트로프의 제5근위전차군의 전차 수는 600여대에서 50대로 줄어 간신히 방어할 수 있을 정도였다. 

소련군은 이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승리하긴 했으나  손실은 독일군에 비해 훨씬 많았다. 

소련군의 병력 손실만 해도 독일의 4배가 되었고, 전차같은 경우는 독일군에 비해 거의 7배의 손실을 입었다. 그런데도 소련군이 승리한 것은 대단한 소련 인구수에 의한 병력의 뒷받침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소련군은 독일군만 상대하면 되는데 비해 독일은 이탈리아에 서방 연합군이 상륙했기 때문에 더 이상 동부전선의 소련군만 상대할 수 없었고, 전력의 상당부분을 서부전선에 할애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인구나 자원으로나 소련에 비해 뒤쳐저 있는 독일에게 전략적으로 치명타였다. 

 

쿠르스크 전투는 여러모로 독소전에서 독일군의 운명을 결정지은 전투였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패배 이후에도 독일군은 소련군 상대로 대규모 공세를 펼칠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독일군의 마지막 하계공세인 쿠르스크 전투 이후로는 어떤 독일군 부대도 다시는 제대로 된 공세를 펼칠 수가 없게 되었다. 소련에 대한 독일의 공세는 사실상 이것이 마지막으로 쿠르스크 전투에 모든 사활을 걸었던 독일군은 이 전투의 패배로 인하여 결국 최종적으로 베를린을 수비하는 입장에 놓일 수 밖에 없게 된다.  쿠르스크 전투 이후 독소전쟁의 주도권은 완전히 소련군으로 넘어갔던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쿠르스크 전투는 태평양 전선의 미드웨이 해전과 북아프리카 엘 알라메인 전투와 함께  제 2차 세계대전 승패 갈림길의 전환점이 되었던 전투였다. 

 

 



 


 



소련군이 독일 전격전(Blitzkrieg)의 공포를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 보여준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한 뒤 독일군 수뇌부는 어떤 식으로든 러시아인들로부터 주도권을 빼앗아와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 결과 쿠르스크 시의 소련군을 목표로 다방면에서 공격을 퍼붓는 "치타델레(Zitadelle, 독일어로 '보루'라는 뜻)" 작전을 실행하기로 결심하였다. 80만 명의 병사와 2,700대의 전차, 그리고 1,800대의 공군기로 구성된 독일군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최대 규모의 공격군을 조직했다.

독일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던 러시아는 독일군의 공격 목표가 되리라고 예상되는 지점에 철저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우선 엄청난 면적에 지뢰를 묻어놓고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많은 대전차포를 설치했다. 소련군의 탱크 수는 3,600대, 공군기는 2,400대로 독일을 압도했다. 독일의 제4 기갑군은 7월 4일 남쪽에서, 제9군은 7월 5일 북쪽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동부 전선에서 벌어진 가장 격렬한 기갑전이었던 이 전투에서 독일군 기갑 부대와 보병대는 어느 정도 진격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소련의 방어선을 돌파하지는 못했다. 가장 치열했던 전투는 7월 12일, 프로호로프카 마을 근교에서 벌어졌다. 독일의 제2 SS 판처 군단과 소련의 제5 기갑 수비대가 맞서 싸웠다.

7월 20일, 히틀러는 전투를 중지시켰다. 미국군과 영국군 사단이 시칠리아를 침공했기 때문에 군대를 옮겨 동맹인 이탈리아를 지원해주고자 했던 것이다. 쿠르스크 전투는 굳이 따지자면 무승부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소련 사령관들은 독일의 전격전을 어떻게 가로막아야 하는지를 증명하였다. 1943년 한 해에 걸친 반격으로 소련은 독일군을 러시아 중부와 남부 너머로 몰아낼 수 있었다.


종전 후 만슈타인을 비롯한 대부분 독일장군들은 쿠르스크 전투가 잃어버린 승리라고 합니다.

충분히 소련군을 궤멸시킬 능력이 되었는데도 불구 하고, 이태리에 상륙한 연합군을 저지하러 히틀러가 전투 종식과 더불어 일부기갑부대를 차출 했기 때문이라고 하죠.

전투 종료후 기록을 봐도 큰 피해를 입었을꺼라는 독일군 대부분 부대가 생각 만큼 피해를 입지 않고, 오히려 더 적은 전투 손실을 기록했죠. 상대 했던 소련군을 아예 궤멸적인 타격을 당했습니다.

히틀러의 간섭이 없었더라면, 역사는 다르게 쓰여졌겠죠.

프로호로프카 기갑전에서 독일이 전술적 승리를 얻을수 있었던 것은 후방 지원 부대들, 특히 전차 정비대의 피나는 노력의 결과라 할수 있습니다.
 
 신속하고 기민한 이들의 대응으로 소련보다 열세였던 독일 전차들이 손실을 최소화하고 괴력을 발휘할수 있었던 겁니다.
 
 
 
이 점에서 대화력전에 전력화 사업이 편중된 우리 육군에서 필요로 하는 것을 다시한번 생각하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