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기업 5 - 동명그룹 (동명목재, 산업, 중공업, 식품)

 

 

■ 지난 잊혀진기업 시리즈

 

1 - 한일합섬 그룹 (회장 김중원)

2 - 거평 그룹 (회장 나승렬)

3 - 조양상선 그룹 (회장 박남규)

4 - 한보 그룹 (회장 정태수)

5 - 동명 그룹 (회장 강석진)

 

 

■ 동명그룹의 화려한 과거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이름일수 있지만, 부산에 사는 사람이라면 익숙하다는 그 이름 동명.

동명목재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지 너무 오래되어 그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동명목재 그룹의 과거를 들여다보면 얼마나 그 과거가 화려했는가를 알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50여년전인 1960년대 동명 그룹을 대표하는 기업이던 동명목재는 세계에서 세 손가락에 드는 

대규모 합판제조업체였다고 하며, 동명의 가족 회사로는 동명산업(페인트), 동명중공업, 동명해운, 동명식품 등

오늘날의 재벌 그룹 못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업종의 계열 회사들이 존재하였다고 전해진다.

 

당시 동명의 규모는 삼성, 신진(대우자동차 모태) 등과 함께 재계서열 수위권을 엎치락뒤치락할 정도였다고 한다.

 

1970년대 들어와서는 정부 주도의 중화학공업 육성과 중동 지역의 석유파동 등으로

경영여건이 변모해가는 속에서 동명 그룹의 성장세가 다소 꺾이긴했지만,

부산 지역을 대표하는 대기업으로서의 입지는 굳건히 유지해왔다.

 

하지만 동명은 어이없게도 정치적인 소용돌이에 휘말려 모래성마냥 사라지는 비운을 겪게 되는데...

 

이번에는 잊혀진 비운의 목재 왕국, 동명에 대한 이야기를 다뤄본다.

 

 

■ 동명목재의 성장사

 

일제강점기였던 1925년, 20대의 젊은 청년인 강석진(姜錫鎭)이 부산 좌천동에 동명목재소를 창업하였다.

그가 일으켰던 동명목재소는 길거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목공소나 제제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하며,

당시 동명목재소를 세웠던 자리는 지금의 좌천삼거리 부근으로 추정되고 있다.

 

강석진 본인에게 동명목재소의 창업은 나무와 본격적으로 연을 맺는 순간이었다.

단순한 밥벌이 수단으로서가 아닌, 그의 삶에 언제나 함께할 분신(分身)과도 존재였다는 것.

 

강석진은 20여년간 꾸준히 자금을 모아 범일동으로 사업장을 옮기고 합판제조 및 제재시설 확장을 하였다고 한다.

그 위치는 지금의 범내골역 부근, 범천동 부산교통공사가 위치한 자리와 인접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60년대 들어 동명목재는 사업규모를 더욱 키워 부산 용당동에 신 공장을 지었다.

용당동 123번지, 지금의 화물터미널 자리가 바로 그곳이다.

 

동명목재는 포르말린접착제 자체생산과 프린트합판공장 확충 등으로 규모가 더욱 커졌으며,

그 규모는 동양은 물론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으로 융성한 규모를 자랑하였다.

 

 

■ 1970년대 말 급변하는 정치 환경

 

그러나 이토록 튼실해보였던 목재왕국 동명이 어째서 하루아침에 쓰러져 소멸되고 말았을까?

동명 왕국의 몰락을 살펴보려면 1979~1980년 정치 분위기를 조금 이해할 필요가 있다.

 

1979년 YH여공농성 → 김영삼(PK지역의원)제명 → 부마민주시위(항쟁)으로 급격히 번졌다.

하지만 부마항쟁은 박정희 정권에 의해 강경 진압되고 만다.

 

국내 정치인을 비롯 해외 국가들(미국 등)에서 이를 두고 비판과 우려를 목소리를 내었고, 

급기야 10월 26일 박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의 국정 농단에 불만을 품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궁정동 안가에서 두 사람을 암살하는 사건(10·26사태)이 벌어지고 만다.

 

정권 공백기가 발생하고 사회적 혼란이 극에 달하던 시기, 얼마 지나지 않아 12월에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권력에 중심에 서는 12·12 군사 정변이 벌어지기도 한다.

 

 

■ 정국의 급변, 그 원인은?

 

부마항쟁과 10·26사태도 경제난이 기인하여 벌어진 사태라는 것이라는 시각이 있다.

 

박 대통령의 재임 후반에는 경제가 성장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지만 석유파동이 불거지던 시기만큼은 

이례적으로 한국 경제가 지탱이 어려울 정도로 급격히 휘청였던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것이 민생고의 가중으로 직결된데다 평소 1당 독재에 대한 몇몇 국민들의 반감이 시민 전체로 확산되어

민중봉기의 불씨로 작용했으며, 결국엔 민주항쟁과 유혈진압으로 이어졌고 

끝내는 그리고 대통령 암살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이어졌다는 견해가 있다.

 

신군부에서도 이걸 의식해서인지 ‘정의사회구현’이라는 구호를 내걸며 사회 안정에 더욱 더 신경썼고

이를 위해서 전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경제규제와 언론통제 정책을 시작하였다.

 

 

■ 신군부 ‘우리에게 타협이란 없다’

 

1979년 12월 신군부의 등장과 최 대통령의 취임 직후 해가 바뀌어 1980년이 되었다.

하지만 각종 집회와 시위는 여전했고 사회적인 분위기는 여전히 어수선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의 몰락으로 시민들은 제대로된 참다운 시민 중심의 민주국가의 등장을

바라왔던 시기기도 한다. 이를 두고 후대에는 서울의 봄이라고 부르는데,

오히려 신군부는 이에 자극을 받아 5.17 계엄을 선포하고 자꾸 벌어지는 일련의

사회 혼란에 대해선 철저하고 강경하게 진압을 가할 것임을 천명하게 된다.

 

하지만 광주에서 학생 시위를 기폭제로 무자비한 진압이 신군부에 대한 반감으로 확산되어

대규모 민중봉기의 규모가 확대되었으나, 결국 신군부가 군부대를 특파하여

참여자들에게 무차별 학살을 가하니, 이것이 후대에 불리는 광주민주화운동이다.

 

 

 

■ 목재왕국 동명의 붕괴

 

동명그룹이 1980년 5월, 위기설이 감지되다 결국 순식간에 무너져버렸다.

 

1980년대 어려운 사회환경만큼 동명 그룹도 경영여건에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였던 1925년 강석진(姜錫鎭)이 부산 좌천동에 동명목재소를 세운지 55년 만의 일이다. 

 

목재왕국 동명의 붕괴는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그래도 동명목재가 보유하고 있는 세계 수위권의

규모를 자랑하는 합판공장에, 동명그룹 자체로도 나름대로 보유하고 있는 부동산들이 많아 한국 경제가

불황에 휩싸여있어도 그런 규모의 업체가 쉽게 흔들리거나 무너질거라 생각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으리라.

 

한편 창업주 강석진은 목재왕국 동명의 처참한 붕괴에 충격을 받아 자택에 칩거하게 되고,

그렇게 4년 가량 은둔생활을 계속해 오다, 4년 뒤(1984)에 향년 일흔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 동명그룹 붕괴의 각종 낭설

 

목재왕국 동명이 덧없이 쓰러진 데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그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12·12사태로 등장한 신군부의 등장과 무관치 않은 내용이라고 한다.

 

 

① 신군부의 탐욕 : “얼른 내 놔, 이제 동명은 우리가 접수한다.”

 

일단 목재왕국 동명이 삽시간에 쓰러진 데는 신군부가 동명그룹 회장, 사장, 임원을 몰래 납치하고

경영권 포기각서 작성을 강요함으로써 신군부가 동명그룹의 자산을 모조리 강탈하는 바람에 

안그래도 자금난에 허덕이던 동명그룹이 삽시간에 쓰러졌다는 이야기가 가장 널리 전해지고 있다.

 

즉 동명그룹이 경영을 못해서 쓰러졌다기보다 신군부의 탐욕에 의해 아깝게 희생되었다는 시각이다.

 

 

 

② 부산에 대한 악감정 : 신군부가 본보기로 쓰러뜨렸다?

 

목재왕국 동명은 무엇보다도 한국 제1의항구도시 부산에서 제일가는 기업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다.

근데 오히려 이런 부분이 신군부에게 표적이 되었다는 속설이다.

 

그럼 왜 하필 한국 제1의항구도시 부산의 기업을 본보기로 쓰러뜨렸을까?

동명이 쓰러지기 1년 전, 부산에서는 박정희 정권 붕괴의 기폭제가 됐던

부산 마산 민주항쟁의 여파로 군사정권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해있던 시기였다.

 

근데 이 박정희 정권이 흔들리다못해 10·26 사태로 붕괴돼버리면서, 군사정권에 대해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해오던 

신군부 수뇌부에서는 나중에 정권을 잡은 뒤 부산 지역에 악감정을 갖고 본보기를 보여주겠다는 생각에서

부산 지역의 경제를 책임지는 대표적인 기업이었던 목재왕국 동명을 쓰러뜨리려는 계략을 부렸다는 속설이다.

 

이 논리는 동명 붕괴 후 약 5년 뒤 또다른 부산의 대표기업이면서 재계서열 7위에까지 올랐던

국제그룹의 해체에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 당시 국제그룹이 전두환 정권에 대해 비협조적이었던데다

부산 시민들이 군사정권에 반감을 갖고 민정당이 아닌 야당 후보의 의원을 선출시켰다는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③ 최고경영자의 과도한 집착 : “동명목재는 내 분신과도 같아!”

 

동명목재는 창업주 강석진이 20대 시절부터 키워온 사업체다보니 그 규모가 세계적인 수준으로 성장했음에도

최고경영자인 강석진 주도 1인체제 또는 강석진 중심의 가족경영 체제에서 탈피하지 못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폐쇄적인 경영체제가 동명목재에 위기가 닥쳤을 때 극복하지 못하고 좌초하는데 일조했을거라는 설이다.

 

혹은 강석진이 앞서 말했듯 너무도 동명목재라는 기업을 아끼다보니

회사가 어려워져도 잘 안되는 사업부문을 과감히 정리하지 못하다보니,

구조조정의 적기를 놓치고 자금난이 더욱 심화되어 쓰러졌을 거라는 추측이다.

 

마지막으로 신군부의 출범이 있은 뒤, 당시 요직에 있던 한 사람이 동명목재를 비롯한 재벌들에

과도한 헌납요구를 할 때, 자금은 물론 자잘한 설비조차 분신처럼 여기던 창업주 강석진이 이를 거부하여

격분한 신군부 측에서 최고경영진을 비롯한 임원들을 납치, 회사를 강탈했다는 설이다.

실제 부산의 국제그룹이 이와 비슷한 형태로 무너졌다고 전해진다.

 

 

■ 오늘날 동명 그룹의 흔적

 

① 용당동에 가면 동명대학교가 있는데 동명에서 세운 대학교이다.

 

② 종합중공업그룹을 꿈꾸는 두산(斗山)의 계열사 중에 두산모트롤이라는 곳이 있는데 동명중공업이 전신이다.

 

③ 부산 용당동 동명목재 공장이 있던 근처의 부두 이름이 동명부두라고 불리고 있다.

 

④ 옛 동명목재공장부지 근처에 PPG코리아(구 동주산업)라는 곳이 있는데 그 전신이 동명산업(동명페인트)라는 곳이다.

 

⑤ 부산은행 설립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전해지며, 도산 이후 그 지분은 롯데에서 모조리 인수(최대주주)됐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