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저 가는 풍경들

멀어져가는 우리들의 어린 시절 풍경이 있습니다.

이제 그 모습들은 우리의 뇌리 에서는 이미 사라졌고

문득문득 뜻하지 않은 곳에서 한 번씩 만나게 됩니다.

그것을 기억하는 것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일 것입니다.

가슴이 그 모습을 잊지 않고 있었기에 그 모습 속에서

우리는 향수와 추억을 떠 올립니다.

그럴수록 추억은 깊어만 가고 향수는 끝간데 모르고 달립니다.

우리의 어린 시절 다시 돌이킬 수 있다면

지금부터 함께 그 시절로 빠져 보겠습니다정말 얼마나 좋을까요?.

처마 밑에는 장작이 쌓여 있고

추녀 밑에는 씨앗이 될 곡식들을 말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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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단의 모습이 정겹습니다.

우리 사촌형님은 적어도 저런 나뭇단을

서너개는 거뜬히 지는 장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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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밑과 처마 밑은 장작을 보관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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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림감시원, 즉 똥태가 동네에 나타나면 산에서 가져온 나뭇단은

다 숨겨버리고 처마밑에는 장작만

쌓아두었습니다.

잔솔가지 같은 것은 산에서 조달하는 것이 상례였지만 장작은

시장에서도 살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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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어린 시절만 해도 다듬이질 하시는 어머니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 고생을 뒤로하고 이제는 다듬이 질을 마치 무슨 음악정도로

느끼는 세월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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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잔불이 아무리 밝아도 촛불만 못했고 촛불이 아무리 밝아도

30촉짜리 백열등보다 못했겠지요.

그러던 것이 60촉 100촉짜리 백열등을 이어 형광등과 네온사인과

적외선 형광등까지 나왔습니다.

세상의 변화가 그렇게 빠른데도 아직 우리 가슴속에는

등잔의 추억이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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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태기 만큼 용도가 많은 것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저속에 토끼풀도 들어갔고 사과나 감자도 들어갔고

벼이삭도 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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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렇게 멍석을 보관했다가 잔칫날이나 단오날 혹은 명절이 되면

마당에 펴놓고 신나게 놀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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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안에도 온갖 기구들이 주렁주렁 메달렸습니다.

조리와 가마솥 닦는 솔도 보이고 무명실 트는 활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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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께서는 부뚜막에 저렇게 음식상을 봐놓으시고

학교 갔다오는 우리를 기다리셨습니다.

개다리 소반과 상보....정겹지요.

부엌 아궁이 앞에는 언제나 저렇게 땔감이 놓여 있었습니다.

시래기와 각종 씨앗들이 처마 밑에서 말라가고 있습니다. 시래기는

겨울철 먹거리로 씨앗들은

이듬해 종자로 쓸 것이겠지요. 우리 집에서 처마가 차지하는

비중이 저리도 높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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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탉이 병아리를 낳으면 이 망속에서 보호를 받았습니다.

저 망을 땅에 내리고 바닥에 짚을 뿌려주면 병아리들이 종종거리며

저 속을 뛰어다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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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대 밑 초가집 시절,

어머니는 돼지를 쳐서 살림을 일구기도 하셨습니다.

여치집입니다. 보리짚을 꼬아서 만든 것이지요.

저 속에 여치를 넣고 바닥에 내려놓으면

여치나 곤충들이 도망칠 수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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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원두막은 조무래기들은 물론이요

어른들의 담소 장소로도 제격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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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저 정도의 우물을 파려면 최소한 저 너비보다 세 배는

더 땅을 파고 내려갔을 것입니다.

우물 파는일이 그렇게 어려운 공사인줄은 파본 사람만 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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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입니다.

물을 담으면 물장군 똥물을 담으면 똥물장군이 되었지요.

깨이를 멋지게 펴기 위해 철길까지 달려갔던

개구쟁이들이 지금은

최소한 마흔은 넘었을 것입니다.

한 번더 추억을 곱씹어 볼까요? 구슬입니다.

구슬치기를 다마치기라고 불렀지요.

말속에서 아직 일제 시대의 잔재를 떨쳐버리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오색 영롱한 구슬들은 '꼬까'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맨숭맨숭 단색의 구슬보다 훨씬

귀하게 여겼지요.

구슬을 찍을 때 프레쉬를 터뜨려 보았습니다.

백열등이나 형광등에 구슬을 비추어 보면

이런 빛깔이 나곤 했었지요.

어지간한 초등학교 3-4학년이면

저 정도는 다 혼자서 만들어 탈 줄 알았습니다.

언제 함께 얼음 썰매라도 같이 타보시지 않으시렵니까?

/옮겨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