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청계천 주변모습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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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제국시기. 사진위) 천변 호안석축은 잘 쌓여져 있고 군데군데 풀이 무성하다. 
       석축 위 천변길에는 많은 사람이 이리저리 바쁘게 오가고 있는데, 
       양반 여인네들이 장옷을 입고 얼굴만 내놓은 채 걷고 있다. 
       청계천 남쪽을 촬영한 듯 길가 벽에는 창이 보이지 않는다. 

    (1900년경, ⓒ고종호 '京城名所' 사진엽서) 종로방향에서 광통교를 바라보고 찍은 사진이다. 
    광통교는 남대문로와 종로를 연결하는 길목으로 남대문에서 종로로 가려면 반드시 
    이곳을 통과해야만 했다. 
    따라서 이곳은 시전 상업의 중심지였으며 도성에서 사람들이 가장 붐비는 곳 중의 하나였다. 
    사진 중앙에는 광통교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한 난간석이 잘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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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변 빨래터(1904년, ⓒ서희경)

 

   청계천 상류는 물이 얕고 맑아 빨래를 하려는 주변의 아낙네들이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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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게꾼(대한제국시기, ⓒ서문당)

 

청계천을 따라 나있는 길이 좁은 듯 개천을 보호하기 위한 축대 밑에 과일가게가 있고, 그 옆에 곰방대를

쥐고 있는 중년 남성이 쭈그리고 앉아 있다. 그리고 지게에 무언가를 담고 가는 지게꾼이 보인다. 
수표교 부근은 서울의 중심부였기 때문에 날품팔이 지게꾼들이 일이 걸릴까 하고 모여들곤 하였다. 당시

시골살림이 어려워 서울로 이사 온 사람들은 남정네는 지게꾼으로 아낙네는 행상으로 나서기가 십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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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표와 수표교(일제강점기, ⓒ국사편찬위원회)

 

<위>  수표교 남쪽을 바라본 사진이다. 수표교 남편에는 양 길가에 가게가 들어서 있었다. 
좌측 길모퉁이에 담배를 팔았던 연초煙草(タバコ)가게가 눈에 들어오고, 그 양옆에 약국과 중앙상회지점
간판이 보인다. 그리고 건너편에는 탕반, 탁주, 소주 등을 한자와 한글로 쓴 술집 간판이 보인다.

<아래>  (1950년대말~1960년대초, ⓒ기성철) 어느 한가한 날 수표교를 찍은 사진이다.

수표교 난간 위에는 한 사람이 올라 앉아있는데, 사진소장자 본인이라고 한다. 그 뒤로는 사람들이 오가고

있고, 담뱃가게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사진 속 수표교에는 난간석 1조가 없는데, 소장자의 증언에 의하면,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인한 상처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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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청계천 주변천 (대한제국시기, 삼청동천, ⓒ김종영(朝鮮風俗-井戶ト水汲夫사진엽서))

               나무 뒤로 경복궁 건춘문이 가려져 있고, 천변 우물가에 물장수가 물지게를 지고 있다.

 

         <아래> (1927년, 금청교, ⓒ고종호)

      금청교는 청계천에 처음 놓인 돌다리로 청계천 상류 부근에 체부동과 통의동, 적선동, 내자동으로

      통하는 십자로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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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자촌

   광복과 한국전쟁 후 서울로 피난 온 피난민들은 청계천변을 따라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청계천변 판잣집은 불결과 빈곤의 상징이었다.  큰 비가 쏟아지면 집을 떠받치고 있던 나무기둥이 불어난

   하천에 쓸려가 버렸다. 이로 인해 집 전체가 무너지기도 했다.  한편, 판자촌 거주민들이 버린 생활하수가

   그대로 하천으로 배출되어 청계천은 심한 악취가 진동하고 각종 쓰레기로 몸살을 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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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색공장 (1960년대말, ⓒ원종철)

 

  한 아저씨가 염색한 천을 말리기 위해 대나무로 만든 대 위에 널고 있다. 
  한국전쟁 직후에는 모든 물자가 부족했다. 그나마 미군부대 등 군대에서 흘러나온 군용 물자만이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군복을 염색해서 많이 입었다.  당시 청계천변에는 군복을 염색하는 업체들이 많이 있었는

  데, 이곳에서 방출된 하수는 그대로 청계천으로 흘러들어 갔다.  이 때문에 청계천 하류의 물빛은 언제나

  짙은 회색을 띄고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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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개 전 풍경 (1965년, ⓒ국가기록원)

 

   오간수문 밖 하류 청계 6가 청계천변의 당시 일상 풍경이다. 
   열 지어 늘어서 있는 콘크리트 기둥 사이에서 뛰놀며 물놀이 하던 아이들은 지친 듯 늘어놓은 콘크리트

   파일 위에서 잠시 쉬고 있다. 아이들은 과연 곧 닥쳐올 청계천 판자촌의 운명, 청계천이 복개될 것을

   알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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