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청계천 주변모습 [2]
천변 빨래터(1904년, ⓒ서희경)
청계천 상류는 물이 얕고 맑아 빨래를 하려는 주변의 아낙네들이 모여들었다.')
지게꾼(대한제국시기, ⓒ서문당)
청계천을 따라 나있는 길이 좁은 듯 개천을 보호하기 위한 축대 밑에 과일가게가 있고, 그 옆에 곰방대를
시골살림이 어려워 서울로 이사 온 사람들은 남정네는 지게꾼으로 아낙네는 행상으로 나서기가 십상이었다.
수표교 난간 위에는 한 사람이 올라 앉아있는데, 사진소장자 본인이라고 한다. 그 뒤로는 사람들이 오가고
있고, 담뱃가게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사진 속 수표교에는 난간석 1조가 없는데, 소장자의 증언에 의하면,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인한 상처라고 한다.
<위> 청계천 주변천 (대한제국시기, 삼청동천, ⓒ김종영(朝鮮風俗-井戶ト水汲夫사진엽서))
나무 뒤로 경복궁 건춘문이 가려져 있고, 천변 우물가에 물장수가 물지게를 지고 있다.
<아래> (1927년, 금청교, ⓒ고종호)
금청교는 청계천에 처음 놓인 돌다리로 청계천 상류 부근에 체부동과 통의동, 적선동, 내자동으로
통하는 십자로에 있었다.
하천에 쓸려가 버렸다. 이로 인해 집 전체가 무너지기도 했다. 한편, 판자촌 거주민들이 버린 생활하수가
있었기 때문에 군복을 염색해서 많이 입었다. 당시 청계천변에는 군복을 염색하는 업체들이 많이 있었는
데, 이곳에서 방출된 하수는 그대로 청계천으로 흘러들어 갔다. 이 때문에 청계천 하류의 물빛은 언제나
파일 위에서 잠시 쉬고 있다. 아이들은 과연 곧 닥쳐올 청계천 판자촌의 운명, 청계천이 복개될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