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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제1한강교 중지도 주변의 유원지 모습.  지금은 한강에서 여름철

수영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지만 70년대 중반까지도 수영이 가능했었다.

60년대에는 서울시민이 여름철이면 한강에서 수영을 했고 겨울이면 스케이트를

탔었던 시기이고 그래서 한강에는 이렇게 유흥시설등이 곳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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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변의 판자집촌 모습.  66년이면 이미 서울중심부의 청계천은

복개공사가 되어 차가 다니던 시절이었고 이곳은 아마도 청계천 복개천이

시작된 어느 곳의 모습이라 추정된다.   하천을 따라 무질서한 판자집이

난립해 있고 당시에는 이런 모습이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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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 없겠지만 당시 여름철에는 동네아이들이 물놀이를 하던 곳이었다.

인터넷을 서핑해 보면 복개공사 후에도 청계천변에서 물놀이를 하던

아이들의 모습이 찍힌 사진기록도 볼 수 있다.  당시는 그런 위생관념을

가진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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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상자를 이고 가는 아낙네 모습.   당시에는 이런 나무상자가 참으로 흔했다.

사과상자나 배를 사도 포장이 나무상자였다.  지금도 가끔씩

그때 나무사과장사를 띁으면 쌀겨에 담겨져 있던

사과가 생각이 난다.   당시 사과상자는 무겁고 취급하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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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마을을 지나는 겨울배추를 싣은 우마차 모습.   그때는 서울에도

소를 매단 마차를 끌고 오는 사람도 많았고 말을 맨 마차도 흔했다.

70년대 들어서 소달구지나 말을 맨 마차는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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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시골에나 있을 듯한 모습이 서울에도 흔하게 봤던

모습이었다.   그때는 이런 모습이 일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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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장의 포목상 모습.  당시에 시장에서 포목상을 하면

잘사는 상인급에 들었고 시장에서도 포목집은 항상 돈이 많이 벌리는

사업이었다.   포목점을 밝히고 있는 60와트 전구다마가 참으로 정깊게 보인다.

당시는 형광등 조명보단 전구다마 조명이 흔하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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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남대문시장의 모습인 듯...  지금은 이렇게 하지 않지만

당시에는 계란포장을 짚으로 했었다.   없던 시절이어서 그랬다기 보단

새로운 경제체제와 옛 경제체제가 마주 물렸던 시기라서 옛날 경제방식이

아직 사라지지 않던 시기여서 이런 모습이 보였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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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건어물전의 모습.  지금은 구경도 하기 힘든 굴비꾸러미가 보이고 북어들을

꿰어 놓은 모습이 보인다.   그때는 저 굴비꾸러미를 그냥 들고 다니던 아낙들이나 가장들의

모습도 참으로 쉽게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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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을 보런 온 아낙과 남자들 모습.  당시 시장에는

어린이들의 모습도 흔하게 보이던 시절이었다.   요즘은

재래시장에서 어린이들의 모습을 보긴 참으로 힘든 시절이다.

경동시장 같은 재래시장은 나이 든 노인들의 모습만 보이고

대형마트에 가야 젊은 주부와 아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요즘은 시장에서 부터 양극화가 심화된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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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같은 상하기 쉬운 생선도 냉동판매가 아닌 이렇게 노점에서

팔았고 간간히 어름을 채워주어 생물의 상함을 방지하던 시절이었다.

위생으로 본다면 참으로 한심하다고 볼 수 있지만 당시는 그런 것을 따질

시절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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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에서 바라본 한강과 만리동쪽 모습.  높은 건물이나 큰 건물이 없이

그저 생활을 위한 전용주택만이 존재하던 시기였다.  항상 그렇지만 당시

하늘은 높고 맑았다.  강건너 아주 먼 산까지 깨끗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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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해방촌에서 바라본 이태원지역과 용산 미8군 사령부 지역.   지금은

이곳에 이태원을 지나 잠수교로 가는 길과 터널이 뚫려있는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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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 어디에도 있었던 소위 판자집 모습.  양철지붕도 보이고

타마구라고 불리우던 기름바른 방수천을 씌운 집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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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청계천변의 판자집촌 모습인 듯...

대부분 방수천을 지붕에다 씌운 모습의 집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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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달구지에 쌀가마니를 가득 실은 모습.   당시 쌀 한가마니는 지금과는

달리 80kg이었다.  옛날 힘센 장정은 저 가마니 두가마니도 든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 청년들은 80kg의 옛 쌀 한가마니를 들라면 기겁을 한다.  그만큼

몸은 커졌지만 힘은 옛날 사람들이 더 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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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호동 아차산에 새로 지어진 워커힐 호텔 모습.  한국전 당시

동두천에서 교통사고로 전사한 2차대전의 명장인 워커장군을 기리기 위해

당시 정부에서 아차산에 호텔을 짓고 이곳을 워커힐이라고 지었다.

당시 이곳은 최고급 호텔이었고 일반인은 출입하기도 힘든 호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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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년 당시 천호동지역의 모습과 당시 광나루 해수욕장의 모습. 

당시 한강변에 모래톱만 있으면 수영을 했지만 광나루 해수욕장은

뚝섬과 한강중지도와 더불어 서울시민에게 최고의 해수욕장이었다.

멀리 양주지역까지 보이는 하늘이 너무도 깨끗한 서울의 모습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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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국 험프리 부통령의 방한을 축하는 현수막이 걸린 남대문 모습. 

요즘 기준으로 남대문에 이런 환영현수막이 걸리면 시민들이

난리가 나겠지만 당시는 이렇게 나라의 국보1호에 프랭카드가

걸려도 이의를 제기하는 시민은 없었다.  

그만큼 삶이 힘든 시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험프리 미국부통령은 66년 2월과 6월 한국을 두차례 방문했다.

[출처] 1966년 서울의 모습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