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선대식 기자] 김영호씨의 모습. ⓒ2006 선대식 "돈으로 옭아맸어요. 무리하지 않으면 먹고살기 힘들어요."

화물운송노동자 김영호(48, 경기 성남시 중동)씨의 말이다. '물류를 멈춰 세상을 바꾸자'던 화물연대의 운송 거부는 지난 5일 닷새 만에 끝났다. 세상은 그들의 운송 거부가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에 관심을 가질 뿐, 그들이 '왜' 파업을 했는지 모른다.

그 '왜'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김씨의 25톤 화물차에 함께 타 그들의 생활을 취재하기로 했다. 김씨를 만난 건 지난 20일 오후 3시, 의왕 내륙컨테이너 기지 앞에서다. 화물칸에는 20피트 컨테이너 한 개가 실려 있었다. 김씨는 "충북 진천에서 수출용 기계를 더 싣고 저녁 8시 부산 신항으로 떠날 것"이라고 말했다.

오후 4시, 화물차는 충북 진천으로 향했다. 그렇게 의왕에서 부산으로, 다시 의왕으로 돌아오는 30시간의 화물차 안 여정이 시작됐다. 김씨의 화물차는 조수석이 수납공간으로 개조돼있어 침대칸에 앉아 취재를 해야 했다.

[의왕→부산] "무리하지 않으면 먹고 살기 힘들어"

고속국도를 달리는 화물차 안에서 김씨는 자신이 화물운송업계에 흘러 들어온 이야기부터 꺼냈다. 천안 출신인 김씨는 "집안 사정이 어려워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식당 보조 일을 하면서 돈을 벌어야 했다"고 말했다. 19살이던 77년, 화물차 조수로 일을 하게 됐다. 그렇게 시작된 게 벌써 30년째다.

화물차 안은 뜨거운 토론이 이어지는가 하면 때론 어색한 침묵이 흐르기도 했다. 고속국도를 달릴 때는 화물차가 심하게 요동쳤는데, 침대칸에 앉은 나는 그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야만했다. 그래서일까, 화물차에 탄 지 1시간 만에 허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충북 진천에 있는 한 공장에 도착한 건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오후 6시였다. 곧 공장 구내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김씨는 밥을 먹기 전 알약을 입에 넣었다. 혈당 약이었다.

"당뇨가 있는데, 하루 종일 운전만 하니 운동할 시간이 없어요. 그래서 당뇨는 점점 심해지고 지금 이렇게 약을 먹고 있어요. 또 밥을 제때에 먹지 못하니 위장병을 달고 살죠."

저녁 7시 반으로 예정돼 있었던 화물 적재가 늦어졌다. 김씨는 "화물 적재가 제 시간에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라 매일 시간에 쫓겨요"라고 말했다. 밤이 깊어지자 밖에는 칼바람이 불었다. 김씨는 시동을 끈 화물차 안에 난로를 켜놓고 화물노동자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화물노동자에 대한 세상의 편견, 언론 탓"

▲ 김영호 씨는 "화물이 제 시간에 적재되는 않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말했다. ⓒ2006 선대식 김씨는 "무리하지 않으면 먹고살기 힘들다"고 했다. 화물노동자들은 일주일에 한번 정도만 집에 들어가고 보통은 화물차 침대칸에서 잠을 잔다. 김씨는 이를 "쳇바퀴 같은 삶"이라고 표현했다.

"'따당(서울-부산을 하루에 왕복하는 일)'하면 돈을 좀 벌 수 있어요. 하지만 따당을 하려면 잠을 거의 못 잔다고 봐야죠. 그렇게 점점 피로가 누적돼요. 제 주위에도 3명이 과로로 죽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해야지 먹고 살수 있는 게 화물노동자들이에요."

밤 10시가 넘어서 화물차는 부산을 향해 시동을 걸었다. 옥천휴게소에서 잠시 정차한 것을 제외하면 김씨의 화물차는 부산 신항까지 계속해서 달렸다. 휴게소 주차장은 거대한 화물차들로 가득 찼고 넓은 갓길에는 어김없이 화물차들이 서있었다. 김씨는 "화물노동자들이 차 안에서 잠자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예전에는 화물노동자들이 휴게소 같은 곳에서는 쫓겨났다, 도로공사 직원들이 '고속국도가 너희들 자라고 만들어 놓았느냐'고 면박을 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화물노동자에 대한 세상의 편견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언론에 책임이 있다고 덧붙였다.

"일부 보수 신문들이 운송 거부를 '불법 파업'이라고 했어요. 하지만 우리는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개인사업자예요. 파업이라는 개념이 없어요. 가게 주인이 하루 문 닫았다고 그게 불법 파업인가요?"

새벽 4시가 돼서야 화물차는 부산 신항에 닿았다. 화물차에 동승해 취재하는 것만으로도 극심한 피로감에 시달렸다. "피곤하지 않아요?"라는 질문에 김씨는 "매일 하는 일인데요, 뭘"이라고 답했다. 새벽 4시 30분, 20피트 컨테이너를 내린 후 부산 신항 입구에서 잠을 청했다. 나는 운전석과 조수석을 가로질러 누웠고 이내 잠이 들었다.

[부산→의왕] "삶 자체가 아슬아슬한 줄타기"

▲ 새벽 4시가 넘어서야 부산 신항만에 도착했다. ⓒ2006 선대식 ▲ 부산항 제2부두의 모습. 이곳에는 컨테이너뿐 아니라 포클레인, 각재, 철 구조물 등 각종 수출·입 화물이 쌓여있고, 25톤 화물차들이 물건 싣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2006 선대식 오전 7시 30분, 김씨는 다시 운전석에 앉았다. 3시간 수면 후 바로 출발이었다. 씻을 겨를이 없었다. 김씨는 1시간을 달려 부산 사하구 구평동에 있는 ㅎ사의 화물터미널에 화물을 내려놓았다.

10분 만에 아침을 후딱 해치우고 혼잡한 부산 시내를 거쳐 오전 10시, 부산항 제2부두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컨테이너뿐 아니라 포크레인, 목재, 그리고 철 구조물 등 각종 수·출입 화물이 쌓여있었다. 부두 곳곳에는 25톤 화물차들이 물건 싣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낮 12시, 김씨는 목재 23톤을 싣고 다시 인천으로 운전대를 돌렸다. 오후 1시 30분, 청도휴게소에서 점심을 먹고는 계속해서 달렸다. 신대구-부산, 경부, 중부내륙, 영동 고속국도를 이용했다. 긴 시간동안 지난 운송 거부 때 화물연대가 주장한 표준요율제, 주선료 상한제, 노동자 인정 문제 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 서울에서 부산까지 화물을 운송하면 얼마의 운임을 받나요?

"오늘같이 목재 23톤을 부산에서 인천까지 옮기면 45만원 정도 돼요. 여기에 매달 내는 보험료(20~30만 원), 지입료(15~25만 원), 알선료(30여만 원), 세금 등을 제외하면 한번 왕복에 20~30만원 남아요.

화물차만 30년 몰았는데 한달 평균 수입이 150만 원이죠. 노동 강도까지 생각하면…. 이것도 수리비, 화물차 할부금을 뺀 거죠. 초등학교 4, 5학년인 딸과 아들이 있는데 학원도 못 보내고 있어요."

- 한달 수입이 150만 원이면 생활이 많이 힘들 것 같은데요?

"힘들죠. 15평짜리 월세 살고 있어요.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가 35만원이에요. 외식, 문화생활을 거의 못해요. 일이 피곤해서 일주일에 한번 쉬는 날이면, 하루 종일 잠만 자요. 그래서 전 외출복이 없어요. 양복도 없어요. 항상 작업복만 입죠. 아이들 옷은 2,3년 만에 한번씩만 사줘요. 작아서 못 입을 때까지 입히죠. 그렇지만 예전에는 더 힘들게 살아서 지금 크게 어렵다는 생각은 안 해요."

- 가족들은 화물차 운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가족들이 항상 화물차 운전 하지 말라고 해요. 위험한 직업이다 보니 조마조마하죠. 아이들도 아빠 보고 싶다고 말하고요. 그리고 집사람을 생과부 만드는 일이라 집사람에게 많이 미안하죠. 아이들 가정교육 챙기지 못해서 미안하기도 하고요."

- 화물운송노동자들이 어려운 현실에서 일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다단계 때문이에요. 중간에서 알선한다는 명목으로 다 잘라먹고 우리가 받는 운임은 계약 금액의 60~70%밖에 안돼요. 목욕탕 주인보다 때밀이가 더 버는 거예요.

또한 알선사끼리 경쟁이 심한데 덤핑하는 곳이 많아요. 그런데 중간에서 알선료는 그대로 챙겨가니 그 덤핑 피해가 화물노동자한테 와요. 지입제도 문제예요. 화물노동자들은 지입회사들에게 넘버(번호판)만 빌리는데 15~25만 원의 지입료를 내야해요."(지입제란 5톤 이상의 영업용 화물차는 개별등록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화물차주가 운수업체에 돈을 지불하고 운송사업 면허를 빌리는 것)

"표준요율제·주선료 상한제 도입되면, 노동 여건 개선될 것"

▲ 김영호씨가 부산항 제2부두에서 화물을 적재하고 있다. ⓒ2006 선대식 ▲ 밤 12시 옥천 휴게소 모습. 화물차들로 가득 차 있다. ⓒ2006 선대식 - 화물연대는 표준요율제와 주선료 상한제를 주장하고 있던데요?

"표준요율제는 신고요금을 그대로 받는 거예요. 최저임금제라고 보면 돼요. 주선료 상한제는 현재 30~40%에 이르는 주선료(알선료)를 5% 정도로 막는 거예요. 표준요율제와 주선료 상한제가 도입되면 다단계는 없어지고, 화물노동자의 노동 여건이 많이 개선될 거예요."

- 정부는 "운송료가 천차만별이라 기준을 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표준요율제를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데요?

"운송료가 천차만별이라 기준을 정할 수 없다는 건 정부 스스로가 무능하다는 것 아닐까요? 의지만 있으면 되는 거예요. 기준을 못 정할 이유가 없어요."

- 주선료 상한제의 경우, 정부는 시장 논리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입장인데요?

"정부가 1997년 운송사업 자율화를 단행해 화물차 공급이 엄청나게 늘었어요. 그래서 다단계가 생기고 주선료도 많아졌어요. 정부의 정책 실패죠. 그리고 정부에서는 화물노동자와 알선업체가 알아서 주선료를 정하라고 하는데, 말이 되나요?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죠."

- 노동자성 인정 문제도 있는데요?

"산재보험 문제가 걸려 있어요. 보통 산재보험은 사용자가 내잖아요. 화물노동자는 노동자성이 인정되지 않아 개인 부담이에요. 전 돈이 없어 산재보험에 못 들었어요. 사고가 안 나길 바랄 뿐이죠. 99년에 화물을 싣다가 떨어져 두 달간 병원신세 졌어요. 그때만 생각하면…. 하나님만 믿고 있어요."

의왕에 도착하니 저녁 8시. 김씨는 나를 의왕에 내려주고 인천으로 운전대를 돌렸다. 김씨는 "인천에 도착해 화물을 내리고 그곳에서 잔 후, 내일 다시 부산으로 내려갈 거예요"라고 말했다. 김씨는 그가 말했던 '쳇바퀴' 속으로 들어갔다.

경기도 의왕과 부산을 왕복한 30여 시간동안의 화물차 안 취재는 극도의 피로감, 졸음과의 싸움이었다. 직접 운전하는 김씨의 사정은 안 봐도 뻔했다. 의왕으로 올라오는 내내 창문을 열어놓고 계속해서 스트레칭을 하는 등 졸음과 싸워야 했다. 김씨는 말한다.

"삶 자체가 아슬아슬한 줄타기예요."

/선대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