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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우비 입고 자신을 정원사라 소개했던 분"…美 광고전문가 한나 씨의 회고


“망설이다 연락했어요.” 한국경제신문 편집국으로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떨리는 목소리의 젊은 여성. LG그룹 출입기자를 찾았다. “별세하신 구본무 LG그룹 회장님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어요.” 머릿속에 재벌 오너를 소재로 한 아침 드라마의 ‘단골’ 스토리가 떠올랐다. 숨겨진 가족사 같은. 하지만 그가 풀어놓은 이야기는 잠시 스쳐간 생각마저 부끄럽게 했다. 전화를 건 한나 씨(34)를 22일 만났다. 미국에서 광고 및 홍보 관련 일을 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지금은 인정받는 광고인이 됐지만 구 회장이 아니었다면 자신의 오늘은 없었을 거라고 말했다. 한씨의 사연은 그가 직업계 고등학교 3학년이던 20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화원 스낵코너 알바생들과 어울린 노신사

경기 이천시 이평리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한씨는 꿈이 없었다. 건강 문제로 돈을 잘 벌어오지 못하는 아버지, 지병으로 다리가 불편한 어머니와 함께 살며 중학교 시절부터 온갖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었다.

구본무 회장을 처음 만난 건 2003년 여름, 소나기가 내리던 날이었다. 방학을 맞아 옆동네에 있는 LG그룹 교육기관인 인화원으로 일을 나갔다. 스낵코너를 청소하고 음식을 나르는 일이었다. 업무가 끝난 오후 4시. 식당을 정리하고 있는데 노란 우비를 입은 사람이 걸어들어왔다. 비를 흠뻑 맞은 그는 “젖은 팔을 닦을 수건을 달라”고 했다. 식당에 있던 마른행주를 건네자 그는 “고맙다”며 몸을 닦았다. 아르바이트생들이 “누구시냐”고 물었다. “인화원에서 꽃과 나무를 가꾸는 정원사”라고 했다.

정체 모를 정원사는 간간이 스낵코너에 들렀다. 학생들은 스스럼없이 그를 대했다. “아저씨는 나이가 많아 할아버지라고 불러야겠다”고 놀리기도 했다. 어느 날 그 노신사는 2층 높이에 달린 벌집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한나야, 저 벌집 좀 떼줄 수 있겠니?” “공짜로요?” 아이스크림 한 통으로 ‘계약’은 성사됐다. 시골 생활에 익숙하던 한씨는 능숙하게 벌집을 제거했다. 할아버지 같던 아저씨, 아이스크림을 사주던 정원사는 LG그룹을 이끌던 고(故) 구본무 회장이었다.

“물려받은 기업 키우려면 더 많이 노력해야지”

한씨가 구 회장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은 첫 만남이 있은 지 2년이 지나서였다. LG 계열사 주요 경영진이 참석하는 회의가 인화원에서 열렸다. 일손이 부족해 한씨도 도와야 했다. 회의장 한가운데 ‘회장’이란 명패 뒤에 정원사 아저씨가 앉아 있었다. 옆에 다가간 한씨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박! 회장이셨어요? 왜 여태 말씀 안 하셨어요!”

아르바이트생들은 구 회장에게 가끔 치기 어린 질문도 했다. “그래 봤자 다 물려받으신 거 아니에요?” 구 회장은 “물려받은 기업을 성장시키려면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 아느냐”며 껄껄 웃었다.

한씨의 사정을 전해 들은 구 회장은 어느 날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1000만원이 들어 있었다. “중요한 시기니 공부에 전념했으면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한씨가 인화원에 출근한 마지막 날이었다. 한씨는 이 돈으로 학자금대출을 갚고 대학을 졸업했다.

“버스도 타야 세상 돌아가는 일 제대로 알 수 있지”

대학을 졸업하고 한씨는 광고회사에 계약직으로 취업했다. 28세이던 2012년 한씨는 구 회장과 우연히 재회했다. 한씨가 있던 건물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방문한 구 회장과 마주친 것이다. 구 회장은 한씨를 기억하고 반가워했다. 며칠 뒤 한씨는 회사로부터 정식 인턴 기회가 주어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정규직 사원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알고 보니 구 회장 덕분이었다. 그날 회의를 마치고 돌아간 구 회장은 한씨가 일하던 회사의 사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순수한 아이이고, 성실한 사람이니 믿고 일을 맡겨봐도 좋을 겁니다.”

이후 한씨는 광고업계에서 승승장구했다. 업무능력을 인정받아 미국 파견 기회까지 얻었다. 이를 악물고 노력해 미국 현지업계에서도 자리를 잡았다. 한국 기업과의 광고 제휴 건으로 이달 초 한국을 찾은 한씨는 구 회장에 대한 감사를 전하기 위해 한국경제신문의 문을 두드렸다고 했다.

한씨가 인화원에서 일하던 시절 퇴근할 때면 인화원 앞에서 마을버스를 기다리는 구 회장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재벌 회장이 자가용을 안 타고 왜 버스 타시냐”고 물으면 “버스도 타야 세상 돌아가는 일을 제대로 알 수 있다”며 웃었다고 했다. 그때 구 회장은 버스를 타고 어디로 갔을까. 한씨는 지금도 궁금하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