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려야 옳으냐
사랑이란 이런가요 비 내리는 호남선에
헤어지던 그 인사가 야속도 하더란다

 

다시 못 올 그 날짜를 믿어야 옳으냐
속는 줄을 알면서도 속아야 옳으냐
죄도 많은 청춘이냐 비 내리는 호남선에
떠나가는 열차마다 원수와 같더란다

 

 

100년의 역사를 지닌 호남선 철도, 그 이름 자체만으로 파란만장한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1914년 일제가 조선반도 최대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의 식량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건설됐으며,

 

해방 직후 1950년 6·25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적 비극을 맞아 철도 수송망의 파괴를 겪었고,

 

1960년대에 들어서는 도시 농촌간, 1970년 이후로는 영호남 지역갈등의 상징처럼 여겨졌습니다.

 

호남선 철도를 상징하는 노래는 가수 손인호비나리는 호남선(1956)이 원조이며,

 

이후 호남선을 배경으로 한 가수 김수희남행열차(1985)가 히트곡이 되기도 했습니다.

 

 

 

■ 호남선 철도 노선 소개 (서대전 ~ 익산 ~ 광주송정 ~ 목포)

 

○ 호남선은 서남부 부 도서지역의 중심지이자 항구도시인 목포역이 종착지입니다.

 

○ 목포에서 출발한 호남선 열차는 금성(나주), 송정(광산), 정주(정읍), 이리(익산)을 경유하여 충청권으로 넘어옵니다.

 

○ 충청권에서는 강경, 논산, 서대전을 거쳐 대전역까지 이릅니다.

 

○ 대전역은 일제 강점기에 경부/호남선 철도 환승거점으로 애용되면서 발전의 기틀을 닦게 됩니다.

 

○ 이후 호남선 열차는 지금처럼 서대전역에서 곧바로 경부선과 연결되어 서울역까지 들어오는 형태로 바뀌었습니다.

 

○ 수십년전 소싯적 덜컹덜컹 완행열차로 목포역에서 서울역까지 가면 무려 14시간이 소요됐다고 합니다.

 

○ 호남선 철도의 중추역은 전주의 관문인 이리역과 광주시내로 들어가는 관문인 송정리역(광주송정역)이었습니다.

 

○ 호남선 철도의 종착지는 목포역이지만, 대부분의 열차는 구 경전선(광주선) 철도 상에 있는 광주역까지만 운행되었습니다.

 

○ 광주행 열차는 송정리역으로 가기 직전 경전선 철도를 이용하여 광주역까지 들어옵니다.

 

 

■ 호남선 철도의 복선화 과정

 

① 호남선 철도의 1단계 복선화 (1968 ~ 1978)

 

호남축의 복선화는 박정희 정권의 철도증설 및 개량사업에 따라 추진됩니다.

 

1960년대 박 정권은 정선선 건설, 강원권 산업철도 전철화 추진 등 철도건설 사업에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특히 박 정권은 진보성향 정권이 제5대 대선에서 도시 쪽보다 농촌 쪽에 많은 지지층을 두고 있었던 점을 생각하며,

 

호남쪽 농촌 지지층을 더욱 탄탄히 확보하려는 차원에서 1차적으로 대전~익산 구간의 호남선 복선화 사업을 추진하게 됩니다.

 

하지만 1차적으로 추진된 대전~익산 구간이 계룡산 일대의 험한 산세는 건설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데다,

 

자원수송이 주목적이었던 강원권 산업철도와 달리 호남선은 여객수요가 주된 경우다보니 투자에 소홀해진 감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박 정권이 유신체제로 재편되면서 산업화와 근대화를 구호로 내걸고 지하철 및 고속도로 건설 사업에만

 

집중 투자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철도사업에 대한 투자는 점차 소홀해지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 결과 호남선 복선화는 1968년 시작되어 1978년에 대전~이리 구간을 겨우 완성하는 정도에 그쳤습니다.

 

경부고속도로가 1968년 착공하여 1970년 완공되고, 곧이어 호남 남해고속도로가 1970년 기공하여 1973년 준공되었다는 점은

 

박 정권이 철도 건설사업에 대한 투자를 줄이고, 고속도로 건설 사업에 집중적인 투자를 벌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반면 여객 철도보다 화물 철도 비중이 컸던 충북선 복선화는 꾸준히 추진되어 전두환 정권 초입인 1980년에 완성됩니다.

 

 

 

② 이리역 화약폭발 사고 (1977. 11. 11)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인화성 물질이 잔뜩 실려있는 화물열차가 정차 도중에 폭발하는 대참사가 벌어진 사례가 있습니다.

 

당시 한화 소속의 화약제품이 가득 담긴 화차는 인천에서 출발하여 광주로 가던 도중 이리역(익산역)에 대기하게 되는데,

 

화차를 담당하는 철도직원들이 급행료 거래가 제대로 안되었다는 이유로 해당 열차를 거점역인 이리역에 그대로 방치시켰고,

 

추위에 떨던 호송원 신씨가 답답한 나머지 양초를 켜고 화약이 실린 화물칸에서 양초를 끄지 않은 상태로 잠들다

 

양초가 엎어져 화차에 불이 옮겨붙는 사태가 발생, 신씨가 이를 알고 진압하려 했으나 작은 불씨가 순식간에 크게 번졌고,

 

화재를 진압하지 못한 신씨는 담당 철도 직원에게 알렸으나 철도 직원 역시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현장을 피하게 되었으며,

 

다이너마이트가 가득 실린 화차는 곧 대폭발을 일으킴으로써 수많은 이리시민이 목숨을 잃는 대참극으로 이어지고 맙니다.

 

 

이리역 대참사의 발생 책임은 호송원과 담당 철도 직원을 교육하는 철도청과 한화그룹에도 악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또한 재벌 그룹에서 일으킨 대형참사로는 한화의 이리역 폭발사건 외에도 두산의 낙동강 페놀유출사건과

 

삼성건설의 구포역 열차전복사고, 삼성중공업의 태안기름유출사건 등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대참사가 일어나는데도 현장 책임자가 피해를 모면했던 사건은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지하철 방화사건이 대표적이며,

 

약 4년전 세월호 참사 역시도 선장이 제대로 조치하지 않고 도주함으로써에 승객들이 피해를 본 대참사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한건 세월호 참사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근혜가 당시 대통령 영애 자격으로 복구가 완공된 날 참석했다는 사실입니다.

 

 

 

③ 1980년 5월 광주 항쟁으로 차단된 광주역의 열차 운행

 

1980년 5월 중순부터 광주 일대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정치군인의 집권에 반발하는 시위가 있었으며,

 

상급부대의 명령으로 시위대에 대한 진압작전이 개시되자 시민들까지 합세해 전민적인 항쟁으로 번지게 됩니다.

 

하지만 항쟁은 군부대의 의해 무참히 진압됩니다. 이 무렵 광주역은 호남선 열차가 끊기는 수난을 겪습니다.

 

 

 

④ 호남선 2단계 복선화 추진 (1981 ~ 1988)

 

호남선 복선화는 전두환 정권에 이르러 지역 감정으로 악화된 호남권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차원에서 진행되었습니다.

 

당시 대통령이던 전두환은 이리역(익산역)에서 정주역(정읍역)까지 복선화가 완료됐을 때 개통식에 참석했으며,

 

정주를 거쳐 송정리(광주송정역)까지 복선화가 완료됐을 때는 후임 노태우가 송정리역에서 열린 복선화 준공식에 참석합니다.

 

 

 

⑤ 호남선 3단계 복선화 추진 (1990 ~ 2003)

 

호남선 복선화가 송정리역까지 완료됨에 따라 목포역까지 복선화가 추가적으로 검토되고, 

 

문민정부에 들어서 송정리역부터 일로, 임성리역까지의 복선화가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호남선 복선화는 김대중이 이끄는 국민의정부가 출범하면서 목포역까지 완벽하게 진행되었고,

 

그 사이 경부고속철도와 호남선을 연결 운행하는 방안이 검토되면서 전철화 사업도 동시에 추진됐으며,

 

2001년 송정리~임성리 간 복선화가 먼저 완료되고, 2003년 목포역까지 복선화를 완전히 마쳤으며,

 

2004년 3월 복선전철화의 완료로 2004년 경부고속철도와 동시에 호남선에도 고속열차를 운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히 목포는 호남선의 종착역이면서도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인 하의도로 가는 관문이라는 상징성도 갖고 있습니다.

 

 

■ 고속도로망의 확대와 퇴보하는 호남선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추진된 고속도로 건설은 마이카 시대의 도래에 힘입어 현재까지도 부지런히 추진되고 있습니다.

 

1970년 착공된 호남-남해고속도로가 1973년 준공된 것을 시작으로, 1991년 착공된 서해안고속도로가 2001년 개통되면서

 

호남선 철도를 대체할 새로운 고속도로들이 등장하는데, 정작 호남선 철도에 직격탄을 날린 고속도로는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2002년 개통된 논산천안고속도로인데, 천안에서 조치원(청주), 대전을 들르지 않고 논산으로 곧장 가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 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자가용 수요의 증가는 물론, 기존의 철도 수요조차 고속버스로 이탈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특히 서울~광주 간 금호산업(옛 광주고속, 현 금호홀딩스)의 고속버스는 지역을 대표하는 황금노선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반면 호남선은 2004년 경부고속철도 개통에 따른 호남선 KTX의 운행에도 반쪽자리 고속철, 저속철이라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 호남고속철도 건설사업 추진

 

① 호남 고속철도 건설 추진 (1990 ~ 2015)

 

1990년대 경부고속철도 건설이 한창 진행되던 와중에 호남고속철도 건설이 국토균형발전 차원에서 논의되기 시작합니다.

 

최초에 계획된 천안에서 공주를 거쳐 전주, 광주, 목포의 직선노선으로 쭉쭉 이어지는 형태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2003년 노무현의 참여정부 출범 이후 행정수도 이전 문제 및 청주로 대표되는 충북권의 절대적인 요청에 따라

 

청주 시내와 인접한 청권의 오송역이 분기점으로 확정되면서 호남고속철도 계획은 현재와 비슷한 형태로 추진하게 되었고,

 

2009년에 이르러 비로소 오송역에서 광주송정역까지의 호남고속철도 1단계 건설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호남고속철도 건설은 그동안에 축적된 건설 기술을 바탕으로 공기가 최대한 단축시켜 2015년 4월에 개통을 보게 되었습니다.

 

 

 

② 호남 고속철도 2단계 사업 (2015 ~ 2025?)

 

호남고속철도는 종착역인 목포역까지 계획되어있으나, 2003년 이루어진 호남선 복선화에 따른 노선 개량에 따라

 

기존 호남선의 광주송정~목포 구간만으로도 고속철도 차량이 충분히 고속주행을 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보류되었습니다.

 

정치권에서는 무안공항의 활성화를 명목으로 호남고속철도 2단계 사업을 무안공항 활성화와 연계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으며,

 

2017년 문재인 정권의 출범 이후 전남지사를 지낸 이낙연 총리와 전남권을 기반으로 둔 박지원 의원의 뜻이 맞아 떨어지면서

 

호남 고속철도 2단계 사업 추진은 광주송정 ~ 나주 ~ 무안공항 ~ 목포의 형태로 점차 급물살을 타게 됩니다.

 

하지만 지금 호남고속철도 2단계 사업으로 알려져있는 사업을 잘 살펴보면 광주송정역에서 고막원역까지는

 

기존선에서 230킬로미터까지 운행이 가능하도록 고속화하는 것이고, 이후 무안공항을 거쳐 목포 쪽의 종착역까지는 

 

새로운 선로를 놓는 계획이라고 하는데, 거리가 짧은데다 무안공항을 거쳐서 가려면 부득이 곡선구간이 만들어진다는 점으로 

 

미루어 봤을때 경부선처럼 300킬로미터급 고속신선보다 호남선과 같은 200킬로미터급 준고속 선로가 놓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현재의 추이로서는 호남고속철도 2단계 사업 추진이 고속철 건설보다 무안공항철도 부설에 무게가 실렸다 봐도 무방합니다.

 

 

 

③ 호남 고속철도 2단계 사업 무안공항 연결에 대한 긍정론과 부정론

 

한편 국민의당 박지원 의원은 철도교통은 항공기와 달리 출발지와 도착지 사이를 여러곳 들를수 있는게 특징이고,

 

호남권이 그동안 지역차별로 인해 지역민들이 발전의 혜택을 누리지 못해 마음의 상처가 깊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경부 고속철도가 동대구역에서 부산역까지 직선코스로 이어주지 않고 신경주역과 울산역을 빙 둘러서 가는 것처럼,

 

호남 고속철도가 무안공항을 경유하여 갈 수 있는 것이며, 국토균형발전에도 도움이 된다고 의견을 밝혀왔습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421&aid=0003088007

 

 

하지만 박 의원의 주장에 대해서는 무안공항으로의 무리한 연결 사업 추진은 혈세 낭비만 불러올 뿐이라는 주장과

 

특정 지역 발전을 위해 국가 기간 교통망인 고속철을 저속철로 만드는 행위는 올바르지 못하다는 반론도 있습니다.

 

반면 무안공항 연계는 중국 등 해외 관광객이 인천공항 외에도 무안공항이라는 새로운 이동로가 확보되기 때문에

 

국내적으로는 목포를 중심으로 한 서남해권을 비롯, 광주 전남권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는데 많은 기여를 할 것이고,

 

국제적으로는 중국과의 교역 증대로 서해안권 발전을 촉진하는데 긍정적인 효과를 많이 가져올 것이라는 평가입니다.

 

http://news.naver.com/main/ranking/read.nhn?mid=etc&sid1=111&rankingType=popular_day&oid=023&aid=0003343765&date=20180109&type=1&rankingSeq=1&rankingSectionId=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