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해법 속에 담긴 DJ식 '유머' 김 전 대통령 서울대 강연... 학생들은 송곳 질문 "통일 꼭 해야 하나"     ▲ 19일 서울대에서 열린 김대중 전 대통령 강연에선 학생들이 김 전 대통령의 코앞에까지 진출하는 진풍경을 이뤘다.
19일 열린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울대 강연. 부산대·영남대·전남대에 이어 올 들어 4번째 대학 강연이다. 갈수록 열기를 더해 이날 강연에선 학생들이 김 전 대통령의 코앞에까지 진출하는 진풍경을 이뤘다. 430석 강당에 1200명 가량이 모여든 것. 상당수 취재진 역시 자리를 잡지 못해 행사장 밖에 설치된 화면 앞에서 '간접 취재'를 해야 했다. 좌석과 좌석 사이 계단에도 빽빽이 들어찬 청중으로 기자들조차 비집고 들어가기 힘들었다.

보다 못한 김 전 대통령이 강연 시작에 앞서 "무당은 복채가 많아야 신이 나듯 강연자는 청중이 많아야 신이 난다"며 "해치지 않을 테니 무대 위로 더 올라오라(웃음)"고 말하자 학생들은 재빠르게 단상 주변을 에워쌌다. 순간 경호원들도 당황하는 눈치였다.

김 전 대통령은 요즘 강연·회견·외신 인터뷰 등으로 분주하다. 대학 강연은 일단 다음달 중순께 공주대를 마지막으로 일단락된다. 대학 강연 일정은 이미 6개월, 1년 전부터 예정이 되어 있던 것들로, '북핵' 국면을 맞아 숨가쁘게 소화해 내고 있다.

강연 주제도 북핵 해법과 햇볕 정책에 맞춰지고 있다. 이날 서울대 통일연구소 주최의 강연도 당초 '21세기 도전과 한국의 선택'이었지만 김 전 대통령의 요청으로 '북한 핵과 햇볕정책'으로 변경되었다.

"무당은 복채가 많아야 신이 난다"

북핵 해법을 역설한 이날 강연 역시 '북미 대화' 강조하는데 맞춰져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은 아이젠 하워 대통령이 한국 전쟁 당시에도 북한과 대화해 휴전협정을 체결한 점, 닉슨 대통령이 '전쟁 범죄자'로 규정한 중국을 방문해 모택동을 만난 점, 레이건 대통령이 소련을 '악마의 제국'이라고 했지만 대화했다는 점 등을 들어 "모두 공화당 출신의 대통령들인데, 왜 같은 공화당 출신인 부시 대통령만 북한과 대화를 못하냐"고 화살을 돌렸다.

논란이 되고 있는 개성공단, 금강산관광 사업과 관련 김 전 대통령은 "우리가 북측으로 각기 5km, 10km까지 진출한 것"이라며 "휴전선이 그만큼 북쪽으로 올라간 것을 의미한다"고 평가했다.

"서독이 동독에게 32억불을 줬다. 우리는 매년 1억불을 준다. 정부를 통해 7000만불, 민간인 3000만불. 서독에 비해 1/32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공산당이 더 힘을 얻어서 동독이 서독을 이겼나. 동독이 망했다. 자본주의 바람을 받아들이면 결국 굴복하게 되어 있다. 서독이 산 증거다. 우리가 얼마 줬다고 그것 가지고 자꾸 시비하나."

김 전 대통령은 "나는 햇볕정책을 실천할 때 미국과 긴밀히 협력했다"는 점을 강조한 뒤, "미국의 지지를 확인한 뒤 북한과 접촉을 시작했다"며 "클린턴 대통령은 근자에 나를 만나서 '내 임기가 1년만 더 있었어도 당신과 같이 한반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는 것인데 매우 아쉽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소개했다.

"전쟁은 40대 이상인 사람들이 나가라"

강연 분위기는 질의응답 과정에서 달아올랐다. 5개의 질문에 답하는데 40여 분이 흘렀다. 김 전 대통령을 중간중간 농담을 구사하는 여유를 보였고 학생들은 웃음과 박수로 화답했다. '햇별정책이 경제·사회적 변화를 유도했을지 몰라도 군사·정치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는 역부족 아니었냐'는 새내기 대학생의 공격적인 질문에 김 전 대통령은 "햇볕정책은 남북관계에는 성공했지만, 북미문제에서는 완전히 성공하지 못했다"고 분리해 설명했다.

특히 햇볕정책으로 인한 북의 민심 변화를 강조했다. 김 전 대통령은 "과거에 남한에 대한 증오심·적개심이 전부 부러움과 감사의 마음으로 바뀌었다"며 "일년에 비료·식량으로 간 포대만 해도 수천 개에 달한다, 그것이 질이 좋으니까 햇볕 가리개로도 쓰고, 유리창이 깨지면 거기에 바르기도 하고… 그것이 북에 주는 영향이 얼마나 큰가"라고 말해 폭소를 자아냈다.

"다만 우리가 영향을 제대로 주지 못한 건은 북한의 핵무기다. 그건 남북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미국과 북한의 문제다. 대화를 안 하니 발전이 없다. 미국이 안전을 보장해 준다고 하고 그래도 북이 대화를 안하면 그 때 제재를 해야지, 그게 어째서 햇볕정책의 책임인가. 억울한 햇볕정책을 너무 질책하지 않길 바란다."

한 01학번 학생은 '꼭 통일을 해야 하냐'는 질문도 던졌다. 그냥 남북교류만 하고 연방, 연합체로 사는 게 더 현실성이 있지 않냐는 것. 이같은 질문에 대해 김 전 대통령은 점입가경이라는 말에 빗대 "점입난문"이라며 "1300년을 끌고 온 통일국가가 죄 없이 분단되었는데 통일 노력을 포기한다면 우리 조상의 영(靈)이 우리를 용서하겠나"라고 반문해 웃음을 자아냈다. 이어 "우리가 편안하고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는 통일을 해야 한다"는 말로 통일의 군사적·경제적 효과를 설명했다.

"언제 또 한국전쟁이 터질지 모른다. 북한은 1민족 2국가에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민족의 반역자라고 할 것이다. 우리 남한도 마찬가지다. 특히 경제적으로 엄청난 이익이 나온다. 철도·정유·항만·관광·도로·전기·통신 등의 경제적 권리를 30년, 50년 기한으로 확보하고 있다. 우리가 북한의 경제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가 안하면, 중국이 잡고 들어온다. 지금도 북의 소지품은 8~9할이 중국 것이다. 북은 중국의 식민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김정일 위원장은 나에게 '북은 절대로 중국에 기울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북이 원하는 건 우리와의 화해 협력이고 미국과의 관계개선이다. 북한과 손잡고 중앙아시아, 유라시아 등지로 나아가면 단군 이래 최대 강국, 세계 5대 경제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에게도 정치적으로 호소했다"

▲ 19일 서울대에서 열린 김대중 전 대통령 강연에선 학생들이 김 전 대통령의 코앞에까지 진출하는 진풍경을 이뤘다.
또, 전쟁에 반대해야 하는 이유는 찰리 채플린의 사례를 들어 설명했다. 김 전 대통령은 "사실 나는 나이 먹은 사람으로서 전쟁이 나도 걱정이 없다(웃음)"고 운을 뗀 뒤 "히틀러를 반대하고 전쟁을 반대한 채플린은 '전쟁은 전부 40세 이상인 사람만 나가라' 그랬다, 왜? 나이 먹은 사람들이 자기들은 나가지 않으니까 전쟁을 쉽게 결정해서 젊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기 때문이다"라고 말해 학생들의 박수를 받았다.

카톨릭 신자인 김 전 대통령에게 '종교가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되냐'는 질문도 나왔다. 김 전 대통령은 "나는 기독교를 믿으면서도 항상 하나님이 계신가 의심했다"며 1973년 박정희 정권 당시 중앙정보부에 의해 죽다 살아난 납치 사건 때를 회상했다.

"공작선 위에서 사지가 묶여 있을 때 '바다에 30분 정도 허덕이다가 죽겠지, 차라리 잘됐다, 앞으로 고생도 안하고…' 생각했다가 다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예수님이 나타났다. 예수님 옷소매를 붙잡고 살려달라고 했다. 주님, 제가 국민을 위해 할 일이 많습니다. 나는 예수님에 호소하는 것도 정치적으로 했다.(박수와 웃음)…. 그 때 내가 만난 게 하느님인가 아닌가 권위 있는 분에게 증명을 받고 싶어서 김수환 추기경에게 물어봤다. 그랬더니 당신의 믿음에 있지 내가 증명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 추기경이 틀림없이 하느님이다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걸 안해주더라.(웃음)"

마지막 질문은 피해갔다. 김 전 대통령이 북미 대화를 강조하며 "악마와도 대화해야 한다"고 말한 점을 겨냥, '악마에게 져 본 적이 있냐'는 질문이었다.

김 전 대통령이 "그건 미안하지만 내 사생활 문제"라며 "꼭 알고 싶으면 조용히 둘이 만나자"고 답해 웃음으로 강연을 끝마쳤다. 학생들은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이날 강연에는 부인 이희호씨가 자리를 함께 했고 이장무 서울대 총장도 참석했다. 김 전 대통령의 서울대 방문은 2000년 학위수여식에 참석해 축사를 전한 이후 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