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난무하는 유언비어
방송에서는 광주시민의 피해가 전혀 없다고 왜곡보도했습니다. 그런데 길거리에서는 공수부대원들이 지나가는 행인들까지 몽둥이로 머리를 구타하고 대검으로 찌르는 강경진압을 하고 있었죠. 이 점은 보안사의 통제를 받아 사실보도를 충실하게 하지 않는 당시 언론의 문제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죠.

 

2. 정체불명의 선동자들
당시 가두 방송을 하던 분은 전춘심, 차명숙이라는 분입니다. 5.18 때 선동을 잘한다고 계엄당국에 간첩으로 몰려 고문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첩 혐의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3. 전남도청에 거대한 폭발물 설치
화순광업소 직원 등 (김영봉씨 등) 13명이 다이너마이트를 조립해서 광주에 전달했습니다. 조립하기는 했지만 도화선을 연결하지 않았고, 터지지 않게 주의를 했다고 합니다. 외부 불순 세력이 폭발물을 전달해서 설치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릅니다.

 

4. 장갑차를 운전하는 사람들
광주 아시아자동차(현 기아자동차)에서 KM900 장갑차 4대가 있었는데요. 이 장갑차가 5월 21일 광주 시민에게 탈취됐습니다. KM900 장갑차는 궤도식 장갑차가 아니라, 장륜식 장갑차입니다. 조종방법도 매뉴얼방식이 아니라 오토 방식입니다. 따라서 일반 시민이라고 무조건 조종이 불가능하다고 단정 지을 수만은 없습니다.

시위대의 조종미숙으로 21일 장갑차 4대 중 3대가 계엄군에 회수되었습니다.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공수부대에게 두들겨 맞고 보안대 끌려가서 조사받았습니다.

 

5, 광주교도소 습격

광주교도소는 광주-담양 국도하고 호남고속도로 정확히 바로 옆에 있습니다. 광주교도소 위성 사진 보면 호남고속도로와 광주-담양 국도와 10m 이내로 붙어있습니다. 광주 시민들은 고속도로를 타고 광주 밖으로 나가려고 했는데 공수부대가 교도소 주변 도로를 막고 통행을 금지했습니다. 광주 외곽을 봉쇄해서 폭도의 탈출을 절대로 허용하지 말라는 작전 지시가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교도소에서 직접 교전이 벌어진 적은 한 번도 없고, 교도소에서 500m~1km 떨어진 도로에서 공수부대가 바리케이드 친 곳에서 교전이 벌어진 사례가 있는 것일 뿐입니다.

5.18 당시 광주교도소장이었던 韓道熙씨(70)는 14일 "시민군이 80년 당시 光州교도소를 습격했다는 계엄사의 발표는 사실이 아니다"고 주장했습니다. 韓씨는 이어 "시민군이 교도소를 습격했다면 교도소 주변에 시체가 있어야지 어떻게 도로에 있을 수 있겠느냐"며 "당시 교도소에는 3공수여단 병력이 중무장하고 있어서 교도소 습격이란 상상할 수도 없었고 계엄군이 시 인근 지역의 시위 확산을 막기 위해 무차별 발포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64241)

 

 

가운데 운동장이 보이는 건물이 광주교도소입니다. 사진에서 광주교도소 왼쪽에 있는 도로는 호남고속도로이며, 오른쪽에 있는 도로는 광주-담양 국도입니다. 게다가 광주교도소의 출입구는 고속도로 쪽에 있지 않기 때문에, 고속도로를 타고 광주 밖으로 나가려던 광주 시민들은 교도소 습격 의도가 없었다고 봐야 한다.
( 다른 각도에서 찍은 사진은 http://www.gjdream.com/v2/news/view.html?news_type=201&code_M=2&mode=view&uid=403555 에 있음)

 

6. 해방구 건설
계엄군이 물러나고 시민들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학생시민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한 것은 사실입니다. 학생시민수습대책위원회는 치안유지, 무기회수, 계엄군과 협상을 하기 위해 구성된 조직입니다. 스스로 해방구라고 칭한 적도 없고, 공산주의 조직인 해방구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7. 무등갱생원의 36인조 무장조
무등갱생원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마스크 썼다고 의심하는건데요. 단순히 마스크를 가리고, 복면을 했다고 불순분자로 몰아가는 것은 억지 주장이 아닌가 싶습니다. 계엄군은 최루탄, 사과탄 수천발을 광주시내에 터뜨렸기 때문에, 광주 시민들은 마스크나 얼굴에 수건을 두르고 다닌 것입니다. 제5공화국 시절 민주화 요구 집회에서도 마스크나 복면을 한 사람은 흔히 볼 수 있었죠.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단기간 대남공작하고 북한으로 돌아갈 사람들이 신원노출을 꺼릴까요? 남한에 남아서 계속 살 사람들이 신원노출을 꺼릴까요?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8. 평양방송 광주사태 실황 중계
일부 탈북자는 평양방송에서 광주사태 실황을 중계했다고 주장합니다. 참으로 어이가 없죠.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중계시설, 송신소도 없이 광주에서 수백km떨어진 평양까지 어떻게 생중계를 할까요. 만약 북한이 생중계를 했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1980년 북한은 노트북, 와이브로, 고화질디지털카메라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9. 13구의 신원미상 시체
13구가 아니라 11구였고요. 2001년 DNA 검사로 11구 중 6구의 신원이 밝혀졌습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143&aid=0001949099)

남은 5구 중에 1구는 4살짜리 아이, 1구는 40대 중년 남성, 1구는 22일 광주가 아닌 목포에서 비무장상태로 시위하다 차량에서 떨어져 죽은 자입니다. 북한이나 불순세력하고 관계가 있을 수가 없죠.

 

대구 지하철 참사나 삼풍백화점 붕괴사건에서도 신원미상자가 5명씩 되는데, 대형참사에서는 어쩔 수 없이 발생할 수 밖에 없는 문제라고 봅니다.

 

10. 5.18 유공자 윤기권의 월북
윤기권은 1962년 전북 정읍 출생으로, 광주 대동고등학교를 다니다 5.18을 맞았습니다. 5.18 진압 이후 항쟁의 충격으로 정신질환을 앓았고요. 윤기권이 월북한 행위는 분명히 잘못됐습니다. 하지만 광주 시민 수십명이 집단 월북한 것도 아니고, 정신질환자 단 한명이 월북했다고 5.18 전체를 매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그리고 5.18 당시 신원이 확실한 고등학생이였는데 항쟁을 주도했다거나 북한의 간첩이라는 주장은 말이 안 됩니다.

 

10. 간첩 이창룡 침투 사건
5월 24일 서울시경에서 간첩단 사건을 발표를 했습니다. 발표를 보면 간첩 이창룡이 광주에 들어가서 광주시민들 시위를 무장폭동으로 유도를 하고 또 선동 업무를 띠고 침투를 했다 라고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러나 계엄군들의 검문검색이 심해가지고 광주로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서울역으로 왔다가 체포가 됐다고 발표했습니다. 이창룡의 침투 사건이야 말로 광주의 경계가 삼엄했으며, 북한 특수부대 600명 침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죠.

 

11. 총상의 70%가 폭도들이 소유한 총에 의해 사망

사망자 중에 M16 보다 칼빈 소총으로 죽은 사람이 많다는 말은 거짓이다. 현존하는 5.18 사망자에 대한 검시 자료 원본은 군부 측의 보안사가 작성한 '광주사태검시참여결과보고', 광주지검이 작성한 ' ‘5.18 관련 사망자 검시’, 광주시청에서 작성한 검시조서, 3가지가 있다. 카빈 사망자만을 따져보자면, 보안사 검시 자료는 카빈 사망자 21명, 광주지검의 검시 자료는 26명, 광주시청 검시 자료는 12명이다. 세 자료에서 모두 카빈 사망자로 일치하는 사람은 8명이다.

5.18을 폄훼하려는 사람들은 제5공화국 발표를 근거 삼아 카빈 소총에 맞아 사망한 사람이 더 많다고 주장하고 있다. 제5공화국의 광주사태 사망자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은 폭도들 대다수가 난동을 부리다 사망했으며,  계엄군은 최소한의 자위권만 행사했다는 것이었다. 카빈 사망자가 많다는 것은  사망자에 대한 책임은 계엄군에 있지 않고 광주 시민 측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5공화국 발표 중 5.18 사망자의 사인에 대한 발표자료는 2가지가 있다. 1982년 국방부가 펴낸 '계엄사'와 1985년 안기부가 발간한 "광주사태 상황일지 및 피해상황"이다.. 최근 들어 특히 지만원이라는 보수 네티즌이 이러한 자료들을 자주 인용한다.

1980년에 일어난 5.18 민주화운동, 5.17 비상계엄전국확대조치 등을 신군부 쪽에 유리한 방향으로 기록하기 위해, 제5공화국의 국방부는 1982년 '계엄사'라는 책을 펴냈다. '계엄사'에는 카빈 사망자, M16 사망자를 구체적으로 분류한 자료는 없다. 다만, 총상 사망자 중 88명이 폭도 자신들의 난동으로 죽었고, 29명만 계엄군에 끝까지 대항하다 사살당했다는 내용이 있다. 지만원은 이 구절을 인용하여, 카빈 사망자가 더 많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계엄사' 내에 구체적으로 이를 뒷받침할 자료는 전혀 없다.

1985년 안기부에서 발간한 5.18 자료에는 카빈/M16 분류가 있으며, 카빈 및 기타총상 사망자가 94명, M16 사망자가 38명으로 나와있다. 지만원은 이 자료에서 사체 검안위원회의 보상금 지급 내역이 있기 때문에 정확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것 역시 당시 검시 과정에 참여했던 문형배 교수(원광대 의대)가 카빈 사망자가 많아진 이유를 증언하여 거짓으로 드러났다. 1980년 당시 군에서는 M16 총탄을 맞은 경우 군에 저항한 것으로 판단하여 폭도로 분류하려고 했다. 하지만 의사와 목사들이 반대했다. 당시 의사 2명과 목사는 난동자(폭도)로 분류될 경우 위로금 등이 지급되지 않았으므로 최대한 양민(비폭도)으로 분류하려고 노력했다. 처음 폭도로 분류된 것은 20여명이 조금 넘었으나 군에서는 이 정도의 비율이면 곤란하다고 하여 격론을 벌인 끝에 최종적으로 38명이 폭도 분류되어 늘어났다. 이 같은 과정 때문에 사체 검안위원회 회의 결과 M16보다는 M1이나 카빈 사망자가 더 많아졌다. (국방부 과거사위 12.12 5.17 5.18 조사결과보고서 126쪽)

5.18 민주화운동이 진압된 이후 검시에 참여했던 전호종교수(조선대 의대. 병리학)는 사체의 원인을 정확하게 규명하려면 부검까지 해야 하는데 당시로서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고 한다. 사체가 썩어 가는 중이었고, 게다가 부검을 하려면 검찰의 수색 영장과 가족의 동의를 거쳐야 하는데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따라서 검시에 참여한 의사들은 단지 사체의 외형만 보고 검시할 수밖에 없었다. 임시방편으로 검시에 참여한 의사들은 총알이 몸 속에 들어간 사 입구와 몸을 뚫고 나온 사 출구의 외형적 상태만 기록하기로 합의했다. 사 입구보다 사 출구의 크기가 더 크면 M16, 카빈 소총은 사 입구와 사 출구의 크기가 차이가 나지 않으면 카빈으로 결정하는 방식으로 사망자를 분류했다. 사출구가 없는 맹관총창의 경우 비교가 어렵다는 점이 있고, 더구나 근거리 사격, 원거리 사격 따라서 달라지는 것을 가려내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다. 카빈과 M16을 정확하게 가려내지 못했다는 점이 두고두고 문제가 되고 있다.

지만원은 M16도 카빈도 아닌, 기타 총상으로 분류된 경우에도 예비군 무기고에서 나온 무기에 의한 총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검시 자료를 직접 살펴보면, 다른 종류의 총기에 부상당해서 기타 총상으로 기록한게 아니라, 도저히 M16과 카빈 둘 중 하나로 분류할 수 없어서 총기 미상으로 분류한 것이다. 또한 계엄군 측에서는 M16 밖에 없었다고 주장하면서 계엄군은 기타 총상 사망자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한다. 1988년 광주특위 청문회만 봐도, 계엄군은 M16 이외의 총기도 사용했다. 당시 박춘권 통일민주당 의원은 계엄군이 "M16 9,646발 M2O3 19발 수류탄 12발 TNT25[파운드] 권총 667발 M6O 925발 66LCW 260발 연막탄 18발 최루탄 150발 오색신호탄 70발 화염방사기 7대 통합계 1만1,792발을 쏘았다"고 말했다.(제 144회 국회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회의록 제 7 호)

 

12. 도청 광장에 들어온 리어카의 시체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21일 02:20 3여단 병력이 전대로 복귀를 위해 탈출 시도, 앞을 가로막는 데모대를 돌파하기 위해 방망이 구타. 사망 2명, 중상 2명 발생"했다는 보고가 보안사에 들어왔고, 시체는 허봉씨로 밝혀졌습니다.(국방부 과거사위 12.12 5.17 5.18 조사결과보고서 80쪽)

 

14. 북한군 출신들의 증언
북한군 출신들이 증언한다고, 무조건 믿을 수는 없습니다. 주장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실질적인 근거가 나와야 하는데, 북한군 출신 증언자들은 제시하지 못 하고 있습니다.

 

전직 노동당 비서 황장엽씨는 5.18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말을 한적이 없고요. 탈북군인협회라고 북한 군인들로 구성된 단체가 있는데  이 단체의 회장이 "5W29;18 광주에 북한특수부대가 투입되었다’는 주장은 현실과 맞지 않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6100&num=53887)

 

15. 김일성 비밀교시
김일성 비밀교시도 실체 불명이고, 우리 정보 당국이 입수한 적이 있는 자료는 아닙니다. 김일성이 4.19에 대해서 한 말이 있는데, 이것이 김일성이 5.18까지 포함해서 남조선 해방기회를 3번 아쉬워 했다는 걸로 와전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조국을 통일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두 번 놓쳤습니다. 그 한번은 6.25이고 또 한 번은 4.19입니다. 6.25때에는 박헌영의 허위보고 때문에 기회를 놓치게 됐고, 4.19 당시에는 연락부가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해서 놓쳐버렸습니다. 그때 내가 함경도 지방에서 현지지도 하던 도중에 4.19가 터졌다는 보고를 받고 평양으로 달려올 정도로 연락부가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손을 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심각한 교훈을 찾아야 합니다. 4.19는 남조선 혁명정세가 무르익은 징조입니다. 이제 다시 한 번 4.19와 같은 좋은 기회가 다가오면 이번에는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동무들도 이런 각오를 가지고 언제든지 기회가 오면 즉각 대처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태세를 갖춰야 하겠습니다(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50341)

 

16. 대한민국의 좌익화
5.18 당시 현장에 있던 조선일보 기자의 취재수첩과 조갑제씨의 증언을 보면, 광주 시민은 자신들이 좌익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김일성은 오판말라'라는 구호를 외쳤다고 합니다. 5.18 이후 반미운동이 일어났던 것과 별개로, 5.18 당시에는 좌익적인 구호가 전혀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