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光州민주화운동 당시 진압작전에 참가했던 유공자 79명은 80년 6월 20일 충무무공훈징을 비롯해 국무총리 표창까지의 훈포장을 받았다.

발포금지 지시로 무혈진압을 시도했던 鄭 雄 31시단과 尹興禎전투교육사령관은 제외됐다. 그러나 유혈진압에 나섰던 鄭鎬溶 특전사령관.崔世昌 3공수여단장.朴俊炳 20사단장에게 충무무공훈장이 수여됐다. 특히 특전사령부와 보병 제20사단은 단체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당시로선 이들에겐 명예의 훈포장이었으나 누가 학살작전에 공헌을 세웠는가를 극명히 보여준 것이기도 했다.

초기에 유혈진압을 지휘했던 7공수여단 33대대장 權承萬중령, 도청앞 집단발포 당시 현장지휘관이었던 11공수여단 61대대장 安富雄중령에게 각각 국무총리 표창이 돌아갔다.

같은해 12월 31일 12.12군사반란에 적극 가담했거나 5.18 光州민주화운동에 직접 참여한 52명에 대해 또다시 태극무공훈장.충무무공훈장.인헌무공훈장.을지무공훈장.화랑무공훈장 등이 한꺼번에 수여됐다. 이들의 서훈 명분은 '국가안보유공'이란 추상적인 내용이었다. 이로써 12.12와 5.18관련 서훈자는 모두 1백31명이 됐다.

더욱이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같은해 8월22일 태극무공훈장과 무궁화 대훈장을 서훈의 구체적 내용도 제대로 밝히지 않은채 수여했다. 여기에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수교훈장 광화대장까지 최고훈장 4개를 거머쥐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들에 대한 서훈 치탈문제는 거세졌다. 95년 4월 7일 5.18 광주민중항쟁부상자회 朴英恂회장등 2백24명은 김영삼 대통령에게 '12.12 군사반란자 및 5.18 광주학살 책임자 서훈치탈'에 관한 청원서를 제출했다.

더불어 각계에서도 이들의 서훈치탈을 문제삼았고 결국 95년 12월 19일 제정된 5.18 특별법에 '상훈치탈'이 못박았다. 이 법 제7조 '상훈치탈'은 "정부는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서훈을 받은 자에 대하여 실사한 결과 오로지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한 것이 공로로 인정되어 받은 상훈은 상훈법 제8조의 규정에 의하여 서훈을 취소하고, 훈장 등을 치탈한다"고 규정됐다.

그러나 5.18 관련단체등은 이 규정에 만족하지 않는다. "오로지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한 것이 공로로 인정되어 받은 상훈"으로 규정으로는 국보위설치와 관련돼 포상을 받은 3백여명의 상훈의 취소나 치탈은 불분명하다는 것. 때문에 이들 포상자들이 국가유공자예우를 받는 특혜부분에 대해서도 정부의 취소.치탈노력이 뒤따라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12.12 및 5.18 관련자들의 논공행상은 다만 상훈에 그치지 않고 5.6共기간 내내 국가요직을 '형 먼저 아우 먼저' 식으로 나눠가졌다.

80년 5월 31일. 국가보위 비상대책 위원회가 발족됐다.

이때부터 신군부 정권 탄생의 발원지인 12.12사건의 주역과 5.17 및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가해자들이 그 실체를 드러내며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5.6共 시절 대단한 권세를 누리며 탄탄한 출세가도를 달렸다.

군의 주요보직을 독차지했으며 군 문을 떠난 뒤에는 장.차관, 국회의원, 국영기업체 사장 등의 노른자위를 차지했다.

5.6共시절 이들은 특전사령관(鄭鎬溶-博熙道-崔雄).수경사령관(盧泰愚-崔世昌-高明昇).보안사령관(全斗煥-朴俊炳-高明昇).육군참모총장(李熺性-黃永時-鄭鎬溶-朴熙道-金振永).국방부장관(尹誠敏-鄭鎬溶-崔世昌).안기부장(全斗煥-兪學聖-張세동)등의 요직을 전유물처럼 나눠 가졌다.

우선 80년 5월 당시 전두환 소장은 이후 중장.대장을 거쳐 최고의 권좌인 대통령에 올랐다. 의리와 인정등 원초적 감정을 중요시한 전두환 대통령은 재임중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12.12주역인 하나회의 인맥을 중용했다. 친구인 노태우에게 대통령직을 상속하는데서 그 권력의 분수령을 이뤘다.

경복궁 모임의 좌장인 유학성 군수차관보는 안기부장을 거쳐 국회에 진출했다. 황여시 1군단장은 83년부터 최장수 감사원장을 역임했으며, 직속상관인 鄭柄宙 특전사령관을 체포한 최세창 3공수여단장은 합참의장을 거쳐 예편한 뒤 광업진흥공사 사장.국방부 장관을 지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발포명령자, 공수부대 과잉진압이란 의문점의 한가운데 자리한 정호용은 12.12 당일만 해도 대구지역의 예비사단인 50사단장에 불과했다. 이 자리는 통상적이라는 예편을 앞둔 한직이다. 그러나 그는 공석인 특전사령관으로 부임한다. 이후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압과정에서 광주 현지에 상주하다시피한 그는 육참차장과 총장 그리고 내무.국방장관을 역임하고 국회에까지 진출하는등 승승장구의 길을 걸었다.

朴熙道 1공수여단장은 육참총장을 거쳐 토지개발공사 이사장을, 張基梧 5공수여단장은 총무처 장관과 근로복지고사이사장을 역임했다. 光州에서 발포가 이뤄진 진압현장의 최일선에 있었던 崔雄 11공수여단장은 특전사령관을 거쳐 대사에 기용됐다.

車圭憲 수도군단장은 교통부장관을 지냈다. 경복궁 모임에서 장소를 내준 張세동 30경비단장은 경호실장과 안기부장으로 권세를 누렸다.

朴俊炳 20사단장은 보안사령관을 거쳐 국회에 진출한 뒤 집권당 사무총장을 3차례나 역임했고, 보안사 인맥인 許和平.許三守.李鶴捧씨는 5共 출범 초 나란히 청와대 수석비서관을 지냈다.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한 군인 중에는 96년 1월 현재 군에 남아있는 사람들도 있다. 송정동 양민학살부대인 20사단 61연대장 김동진씨는 참모총장을 거쳐 군서열 1위인 합참의장에 오른 뒤 올해 10월 국방장관이 됐다.

7공수 33대장이던 權承萬씨는 준장으로 국방대학원에 입교했으며, 3공수 11대대장 林守萬씨도 준장으로 육본 군사연구실장을 맡았다. 20사단 60연대 3대대장 吉暎喆씨는 2군단 부군단장(소장)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