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한 시민 / 무자비한 진압 시민 항쟁유발

  18일 오후 4시를 전후해 시작된 7공수 33대대와 35대대 병력의 금남로 시 위진압은 시민들의 가슴에 분노의 불을 당겼다, 시민들은 서로의 목격담을 숨죽여 나누며 공분에 치를 떨었다. 시간이 갈수록 光州시내는 뭔가 곧 폭 발할 것같은 폭풍전야의 분위기로 팽팽한 긴장감이 더해갔다.
시민들은 이대로 당할수만은 없다는 無言의 연대로 뭉쳐져갔다. 공수부대 의 잔인한 진압은 오히려 시민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연결고리의 역할을 했 다.

암울한 유신의 종말과 서울의 봄에도 불구하고 당시 우리의 민주화 수준 은 걸음마 단계였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저항에 움츠려왔던 시민들도 형 제, 자식인 젊은이들의 고통에는 하나가 될수밖에 없었다. 시민들의 강력한 저항이 시작됐다.

光州항쟁이 일부 학생들의 소극적시위에서 대규모 시민항 쟁으로 변해간 전환점이었다.

당시 光州시청상황일지를 그대로 옮겨본다. 5.17 이전의 학생가두시위에는 시민들이 냉담한 반응을 나타냈으나 5.18 에는 금남로등 시내중심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나 여자를 마구 때리고 짓밟고 찌르는등의 잔인한 행동을 시민들이 보고 놀라움을 금치못하고 있음.

일부 시민들은 군인들이 경상도 사투리를 쓰기 때문에 경상도 사람들이 난동을 부린다고 격분하였고, 일부 부녀자는 내자식도 어디가서 저렇게 맞고다닐 것이다하고 울면서 칼에 찔린 청년들을 노상에서 치료해주려고 하였음(군인들이 방해).

특전대원들이 전라도 새끼들 씨를 말려버려야 한다면서 청년들을 폭행한다는 소문도 나돌고 있음. 거부장옥상에서 구경하고 있던 시민들이 군인들에게 투석하자 군인들이 거부장으로 들어와 3명을 연행한 사례로 보아 일부 시민들이 학생편에 가담할 우려가 있음

이 시청상황일지는 당시 시민들의 심상치않은 동요를 그대로 기술하고 있 다.

전남대 정.후문에서의 피의 진압과 금남로 살육소식에 시민들은 휴일의 나른함을 떨치고 금남로로 모여들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시민과 학생이 하나가 되어갔다.

18일 시위양상은 오후 4시 7공수의 금남로 시위진압시기를 전후해 파출소 등 공공기관에 대한 방화와 투석, 화염병의 등장, 경찰력이 시위대에 밀리 는등 적극적인 양상으로 변해갔다. 全斗煥 물러가라 金大中 석방하라는 정치구호가 시민들의 입에서도 자연스럽게 나오기 시작했다.

금남로에서의 시위가 일진일퇴의 공방을 거듭하자 일부 시민과 학생들은 수백명씩 무리를 지어 태평극장과 光州공원을 중심으로한 光州천일대, 통행 인이 많은 공용터미널일대, 동명동.지산동등 주택가 일대에서 산발적인 시 위를 계속했다. 시민들이 가세한 시위는 서울의 봄 당시의 대학생들만의 시 위와는 달랐다.

오후 4시40분 시위대 3백여명이 지산동파출소에 투석한 뒤 방화하고(전교 사 작전일지), 오후 5시에는 전경 40여명이 시위대에 붙들리기도 했다. 경 찰관이 시위대에 붙들린 것은 光州항쟁 기간동안 이때가 처음이다.

시위대는 전경을 붙잡아두고 경찰버스에 불을 지르는등 기세를 올렸다. 경찰력이 시위대에 밀리기 시작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를 전후해 동명동.지산동. 산수동파출소가 잇따라 피습당하고, 흥분한 시민들은 光州시장 관사에도 돌 을 던졌다. 시민들의 분노가 어울린 적극적인 공세가 시작된 셈이다. 당시 全南大 총학생회 홍보부차장이었던 李광호씨(당시 21세)의 증언.

농장다리쪽에서 경찰차를 포위한 시위대가 40여명의 전경을 인질로 잡았다. 우리는 경찰의 허리끈, 방석모, 곤봉등을 빼앗은후 그들을 앞세우고 약1km 가량 떨어진 장동로터리로 갔다.

이들을 넘겨주고 대신 연행학생들을 석방시켜 달라고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장동로터리에 도착했을때 공수들이 곳곳에 무리지어 있었다. 우리제의에는 대꾸도 않고 곤봉을 휘두르 며 진압에 나섰다. 도망치기에 급급했던 우리는 그때 경찰인질을 놓치고 말 았다 (한국현대사 사료연구소편, 光州5월민중항쟁사료전집에서 발췌)

시민들은 공수부대와도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치른다. 일방적으로 밀리고 쫓기기만한 시위에서 직접 마주서는 양상이 된것이다. 수적으로 열세인 공 수부대는 과격진압으로 시위대를 위협했지만 시위대는 점점 늘어가기만 했 다.

오후 6시께 계림동 光州고 부근에서는 시민학생 3백여명이 운집, 공수부 대와 충돌 20~30분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공수부대를 산수동방변 으로 후퇴하게 하는등 공방전의 양상이 光州시내 곳곳에서 벌어졌다. 그러나 시위대에 의해 공수부대의 반격으로 순식간에 공포지대로 돌변했다.

이런 와중에 오후 5시 50분 11공수여단 선발대인 61대대 1지역대가 光州 공항에 도착했다. 그들은 숙영지인 조선대로 이동하면서 시내 상가지역에서 위력시위를 감행했다. 오후 6시 11공수여단 3개대대를 19일 새벽 0시를 기 해 31사단장이 작전통제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막강한 전투력을 가진 1개 공수여단이 光州로 증파된 것이다.

全南北 계엄분소는 오후 6시 계엄공고 4호를 통해 光州시내 통행금지시간을 밤 9시부터 새벽 4시까지로 연장했다. 통행금지시간연장을 알리는 공고문이 시내곳곳에 나붙었다.

光州의 정신적 지도자인 尹恭熙대주교가 직접 쓴 5.18 비망록중 18일 상황을 보자. 계림동 성당에서 견진성사를 주고 숙소가 있는 학운동 까리따스 수녀원으로 돌아왔다.

계엄령확대와 포고령에도 불구하고 가두시위가 산발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으며 거리에는 시위대와 계업군간의 충돌이 있었다. 나중에 들으니 마침 카톨리센터 6층에 있는 교구청에 기거하는 李영수 신부가 계업군의 잔혹한 행위를 목격하고 도경찰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계엄군의 이성을 잃은 행위에 대해 엄중항의 하였는데 도경국장은 경찰은 절대 그런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답변을 했다고 한다.

李신부가 내게 전화로 이 문제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어왔을때 갑자기 무어라 대답할수가 없었다. 어떻게 할것인가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했다 (광주일보 89년 5월 16일)
尹주교의 상념의 깊이만큼 光州는 대항쟁의 심연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