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년 5월 22일 계엄군이 광주 외곽으로 철수한 이후 시민군이 전남도청을 장악했다. 사진은 사태의 추이를 알고자하는 시민들이 도청 앞을 가득 메운 모습. (사진예술사에서 펴낸 황종건·김녕만 사진집 <광주,그날>에서 발췌)
상황 1
도청 옥상에 내렸다 뜨는 헬기를 보며 윤상원은 말했다. "어젯밤 시위하다 죽은 시신들을 지금 저 헬기로 서해바다에 빠뜨리고 있다. 전 차량에 연락해서 오후 1시까지 카톨릭센터 앞으로 모이라고 전달하라! 사람들을 모두 차에 태우고 도청을 밀어붙여 장렬하게 전사한 무명용사들을 우리가 기필코 구출해야 한다. 아르헨티나처럼 시신을 바다에 던지게 놔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지나는 차량마다 "1시에 카톨릭센터 앞으로!"를 외쳤다. 덤프트럭 적재함에 타고 있던 시위대들도 함께 외쳐주었고, 전달받은 차량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외쳐댔다. "1시에 카톨릭센터 앞으로!". 1시가 되어가자 우리도 카톨릭센터로 갔다. 이미 버스와 트럭 등이 맨 앞줄을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는 두 번째 줄 왼쪽에 차를 댔다. 적재함에서는 '투사의 노래'와 '훌라 송' 등을 계속 외쳐대고 있었다.

이윽고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애국가에 맞춰 붕 부우웅 공회전하고 있던 차량들이 서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순간 '탕 탕 투투투투투~' M16 단발 소리와 연발 소리가 뒤섞이며 애국가를 비집고 들려왔다.

그러나 차들은 계속 전진하고 있었다. 갑자기 앞서 가던 버스가 속도가 빨라지는가 싶더니 가로수를 들이받았다. 그제서야 조수석에 있던 윤태원이가 비명을 질렀다. "오메 형님 총 쏴부요!"

군에서 운전병이었던 나는 얼른 고개를 숙이고 핸들을 돌려 전진후진을 반복하며 덤프트럭의 꽁무니를 총알이 날아오는 도청쪽으로 돌렸다. 잠시 운전석 아래로 고개를 숙이고 엎드리고 있는데, 금남로 바닥에 엎드려 있던 사람들이 일어서며 하나둘 외치기 시작했다. "여기 총 맞았다. 총 맞았다."

이미 총성은 멎었고 적재함에 엎드리고 있던 시위대가 뛰어내려 부상자들을 살펴보았다. 길옆에 바짝 붙어있던 사람들도 뛰어나와 함께 덤프트럭 적재함에 부상자들을 올려 실었다. 그리고 금남로 4가 쪽으로 차를 몰았다.

우회전하여 박인천씨 집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갔는데, 좌측에 병원이 보였다. 적재함에서 누군가 병원 안으로 뛰어 들어가고 나는 의사와 간호사가 뛰쳐나올 때까지 그대로 경적을 누르고 있었다. 부상자들을 모두 병원으로 들여보낸 다음 녹두서점 식구들이 생각났다.

차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윤태원과 함께 녹두서점으로 뛰어갔다. 서점 뒷방에서 이양현 선배와 정상용 선배가 화염병을 만들고 있었다. "형님 화염병 소용없어라우. 금방 백주대낮에 총 쏩디다." 형들은 깜짝 놀라며 "정말? 정말?" 그러더니, "백주대낮에 시위대에 발포했다면 곧바로 계엄군이 진압하러 쳐들어올 것이다. 일단 서점 문을 닫자. 모두 흩어졌다 3시에 보성기업에서 만나자." 나는 어린 윤태원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화염병을 가지러왔던 안길정과 함께 서점을 나섰다.

보성기업으로 가려고 한일은행 사거리를 지나려는데 사람들이 한사코 막았다. 금남로에 어른거리는 사람은 무조건 조준사격을 한다는 것이었다. 한일은행 사거리에서 도청까지는 개미새끼 한 마리 없었고 가끔 탕 탕 하는 M16 단발소리만 울려퍼지고 있었다. 우리는 수창초등학교까지 내려가 금남로를 가로질렀다.

안길정이 말했다. "형, 어떻게 군인들이 민간인한테 총질을 할 수 있다요, 이눔들은 대한민국 군인이 아니라 적이요, 계엄군이 쳐들어온다는디 한 놈이라도 죽이고 같이 죽읍시다"며 바지주머니에서 송곳을 꺼내들었다. "요 밑에 월산동으로 가서 지붕 위에 엎드려 있다가 계엄군이 쳐들어오면 뛰어내려 한놈이라도 찌르고 죽읍시다."

5월 19일 공수들이 카톨릭센터에서 수백명을 살상하는 모습을 본 윤상원은 서점안에 있던 송곳을 바지주머니에 넣으며, "공수들을 마주치면 곤봉으로 내려치기 전에 주위를 둘러보아 10초 안에 담을 넘거나 도망칠 골목을 살피고, 왼손을 45도 머리위로 올려 곤봉을 막은 다음, 칼이나 송곳으로 놈의 허벅지를 찌르고 튀어라!"며 사람들에게 알리도록 했기 때문에 시위를 주도하던 사람들은 대개 칼이나 송곳을 바지주머니에 지니고 다녔다.

2인 1조인 공수들은 M16자동소총을 '어깨 걸어 총'으로 어깨에 비스듬하니 걸치고 있었기 때문에 한 사람이 칼이나 송곳에 찔리면 옆에 있는 공수가 '어깨 걸어 총'을 풀고 조준한다 해도 10초면 충분히 도망을 칠 수 있었다. 서점에 있던 송곳을 윤상원이 가져갔기 때문에 나는 드라이버를 지니고 있었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안길정은 월산동 방향으로 앞서 걸어갔다. 무심코 따라가면서도 나는 혼란스러웠다. 실은 자신이 없었다. 나는 종종걸음으로 쫒아가 안길정의 팔을 잡았다. "보성기업에서 3시에 만나기로 했으니 우선 보성기업으로 가자." 안길정의 얼굴은 비장했다. 주춤거리다 안길정은 발걸음을 돌렸고, 우리는 함께 보성기업으로 갔다.

▲ 5·18수배자 명단. ⓒ <시민의소리> 발굴 상황 2
"너희들 총들고 싸우자고 해서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더 죽게 만들려고 그러느냐? 여기서 나가라! 총 다 뺏어라!" 25일 12시경 광주지역 민주인사들이 YWCA에서 대책회의를 하고 나온 뒤 두 분이 계속 악을 쓰고 있었다. 궐기대회 준비를 하고 있던 우리는 눈이 마주치지 않게 얼른 고개를 돌리고 옆으로 숨었다.

손목을 주무르며 대자보를 쓰던 소심당 안의 여성들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대자보를 써내려가고 있었다. 누구도 대꾸를 하지 않자 두 분은 밖으로 나서며 금남로 곳곳에 붙어있는 대자보를 찢기 시작했다. 대자보에는 공수들의 만행이 낱낱이 폭로되어 있었고 큰 글씨로 '대학생은 YWCA로 모여라'고 씌여 있었다. 이는 공수들의 만행으로부터 광주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대학생들에게 총을 지급하여 시민군을 조직하려던 것이었다.

당시 수습대책위는 학살인정과 군부정권 퇴진, 책임자 처벌과 보복없이 희생자를 안장할 것 등 광주시민들의 요구와 상관없이 강제로 총기를 회수하고 있었고, 무장이 해제되면 곧바로 공수들이 들이닥쳐 또다시 광주는 피바람이 몰아칠 게 뻔하기 때문에 도청 앞 분수대에서는 매일 "총기회수 결사반대"를 외치며 궐기대회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투사회보를 제작하여 시내 곳곳에 뿌리고 궐기대회 때마다 낭독하여 시민들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수습대책위는 계속해서 계엄군이 요구하는 총기회수를 지시하고 있었고 기동순찰대가 강제로 총기를 회수하고 있었다. 숫적으로 우세한 수습파는 오히려 우리를 향해 "저 사람들 이상하다, 빨갱이가 아니냐"며 몰아붙였다.

광주 밖으로 피신했던 동지들이 되돌아오면서 우리는 24일 오후 7시경 YWCA에 모여 우선 대학생을 중심으로 시민군을 조직하고 나아가 향토예비군에게도 무기를 지급하여 계엄군의 진입을 저지하는 한편, 암매장한 시신들을 수습하고 행불자를 접수하여 계엄군의 만행을 대내외에 알리면서 군부정권의 퇴진과 민주정부 수립을 요구하기로 하였다.

24일 밤 우리는 보성기업에 모여 향후 대책을 숙의하였다. 가장 시급한 일은 총기회수를 저지하는 것이었다. 우선 시급하게 이양현, 정상용 윤상원 선배가 나서서 25일 오전 11시 YWCA에 민주회복국민연합 등 각계 민주인사들을 모시고 '우선 총기회수를 중단하고, 학살인정과 군부정권 퇴진, 책임자 처벌과 보복없이 희생자를 안장할 것' 등 광주시민들의 요구를 설명하였다.

그러나 기대했던 민주인사들조차도 막무가내로 총을 드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계엄군은 총기를 회수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협상도 없다는 입장이었다. 심지어 24일에는 협상을 명분으로 100여정의 총기를 반납하고는 시위중 연행된 일부 학생들을 석방했다며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반면 TV에서는 간첩이 광주에 침투하여 무장폭동을 일으키고 있으며 그 중 한 명을 잡았다고 보도하고 있었다. 협상을 위해서라도 총기회수를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빨갱이로 몰리는 상황이었다. 실제 가두홍보를 하던 차명숙과 전춘심도 느닷없이 정체불명의 사람들로부터 간첩으로 몰려 기동순찰대에 잡혀와 곤욕을 치른 적도 있었기 때문에, 민주인사들로부터 총기회수 중단 결정이 나오기를 기대하였으나 도리어 회의장을 나오자마자 악을 써대니 우리는 막다른 길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총기를 회수하고 무장이 해제되면 공수들은 또다시 피의 살육을 자행할 것이고, 지금까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다 억울하게 숨졌거나 암매장된 무명용사들은 영원히 역사에 묻힐 게 뻔했다.

우리는 더 이상 수습대책위에 기대를 걸지 않고 궐기대회를 통해 원래 계획대로 시민군을 조직하여 결사항전을 하기로 하였다. YWCA에 집결한 100여명의 학생들을 10개 분대로 편성하였고, 연락을 받은 안길정이 인솔하여 도청으로 들어가 윤상원의 지시로 무기를 지급하였다. 이렇게 26일에도 70여명의 학생들이 몰려들어 무기를 지급하여 광주외곽에 배치하였고, 300여명의 예비군들에게도 무기를 지급하여 도청과 외곽 곳곳에 배치하였다.

▲ 2003년 5월 17일, 전야제가 열리기 전 당시 시민군들의 항쟁을 재연하고 있다. 5월은 끝났는가

27년이 지났지만 5월항쟁 당시 분연히 일어서 싸우다 산화하신 영령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학살에 관한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며, 명예회복이라는 우리들의 오랜 투쟁이 몇 푼의 보상과 훈·포장으로 다 이루어졌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까? 5·18기념재단이 과연 오월항쟁정신을 담아내고 있다고 볼 수 있는가?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해 본다.

우선 항쟁의 주체 문제이다. 오월항쟁은 군부의 학살과 이에 저항하는 세력들의 무장봉기에 의의가 있다. 무장봉기는 광주와 전라남·북도에 걸쳐 광범위하게 일어났으므로 '전라민중무장봉기'라 규정지을 수 있다.

그러나 5·18기념재단이 과연 오월항쟁의 주체들이 참여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의아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재단 이사와 이사장 구성에 있어서 무장봉기의 주체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아니, 도리어 무장봉기의 주체가 아닌 총기회수를 통해 우리를 무장해제시키려던 사람들이 지금까지 이사장을 맡으며 오월을 대표하고 있다. 또한 모든 시민들이 온몸을 던져 투쟁하던 시기에 정작 앞장서서 싸워야 했을 사람들이 그 당시에는 모두 도망쳐놓고 이제 와서 오월을 대표하겠다고 자처하며 요직을 독차지하고 있다.

5월 18일의 싸움은 시작에 불과하였다. 진짜 힘든 싸움은 5월 19일부터였다. 카톨릭센터의 학살 현장에서 모든 시민들이 "전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은 어디 있냐"며 절규하자, 윤상원은 "그래, 이제 박관현이를 나오라고 해야겠다"며 연락하러 갔다가, 오후 늦게 돌아와서는 "도저히 연락이 안 된다, 광주를 뜬 것 같다"며 낙심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차라리 오월항쟁이 5월 19일로 조용히 막을 내렸다면 일찌감치 도망친 사람들의 지혜가 돋보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5월 19일부터 시민들은 물론 고등학생들까지 시위를 주도했을 정도로 공수들의 만행에 대한 분노는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5월 14, 16일의 소위 '횃불대성회'를 통해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 투쟁하자'던 학생 지도자들이 모두 도망치고 나타나지 않자, 공수들의 곤봉과 대검과 총탄세례에 스러져가는 생명들을 목도하면서 시민들이 얼마나 큰 분노를 표출했는지를 우리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더욱이 오월항쟁은 공수들의 만행에 대항하여 무장봉기로까지 이어졌다. 목숨을 건 시민들의 처절한 항쟁을 뒤로 하고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친 점에 대해 정작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들이 광주를 대표하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동의할 수 없다.

도망친 사람들이 광주를 대표하고 있다

다음은 광주인권상의 문제이다. 1991년부터 5·18유족회에서 시상하던 '광주시민상'과 윤상원기념사업회가 시상하던 '윤상원상'이 2000년부터는 '광주인권상'으로 통폐합되었다.

마침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던 시기와 맞물려 있다. 기우인지는 모르나 무장봉기의 주체를 희석시키려는 의도는 없었는지 묻고 싶다.

물론 5·18 항쟁 당시 우리를 무장해제시키려던 사람들의 입장에서야 자신들의 총기회수 주장이야말로 종교적이고 인권적이라며 더할 나위 없이 좋아하겠지만…. 차라리 '광주시민상'이라면 광주, 전라남·북도의 결사항전을 주장했던 무장봉기의 당사자들도 지금까지 별 이견은 없었을 것이다.

생각해보자. 계엄군이 총을 든 시민군을 빨갱이로 내몰고 있던 상황에서, 우리에게 "총을 들고 싸우자고 해서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려고 그러냐"고 윽박지르던 수습대책위원들이 지금은 오월을 대표하는 이사장과 이사가 되어 오월항쟁 당시의 논리로 인권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과연 5·18광주시민군이 선뜻 동의할 수 있을까?

원통하게 스러져간 영령들을 위로하고 목숨을 건 무장시민군들의 안전을 보장할 아무런 대책도 없이, 막무가내로 총은 안 된다며 총기회수를 선결조건으로 내걸었던 사람들이 지금은 오월항쟁의 대표를 자처하며 인권을 이야기할 때 과연 이를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기막히게도 '민주의 성지' 광주가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뒤부터 '민주·인권·평화의 도시' 광주로 구호가 바뀌어 버렸다. 나아가서 '인권의 도시'를 광주의 브랜드로 만들자고 한다.

인권이라는 보편적 의제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오월항쟁 당시 '총기회수 결사반대'를 외치던 시민군과 '총기회수'만을 선결조건으로 내걸었던 수습대책위와의 갈등을 두루뭉술하게 인권이라는 의제로 덮어버림으로써, 도리어 목숨을 건 처절한 항쟁정신마저 '총기회수'를 주장했던 수습대책위의 주장을 합리화하려는 의도로 '인권의 도시' 광주를 주장하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은 것이다.

더욱이 이 상은 그 출발 자체가 오월항쟁 당시 결사항전을 주장하며 끝까지 투쟁하다 산화하신 영령의 유족들이 만든 '광주시민상'과 '윤상원상'을 통폐합하여 제정한 상인 것이다.

그러나 왠지 이 광주인권상이라는 명칭에는 무장봉기라는 항쟁 주체들의 의지는 가려진 채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무장시민군을 빨갱이로 폭도로 몰아가며 모든 협상의 전제조건으로 내걸었던 총기 회수라는 계엄군의 입장과 또한 이를 무장시민군에게 강요했던 수습대책위의 종교적 비폭력주의와 맞물려 있는 듯 보이는 것은 우리만의 생각일까?

▲ 21일 오후 진보연대와 일부 시민단체 관계자등이 5·18기념문화회관 앞에서 "YS 초청과 감사패 전달을 취소하라"는 기자회견을 열려고 하자, 5월 단체 회원들이 몰려와 이를 막아서면서 실랑이가 벌여졌다. '광주인권상', 항쟁 주체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 동안 오월항쟁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명예회복이라는 기나긴 투쟁과정에 우리 모두 함께 하였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나아가 전국화, 세계화를 위해서는 당사자주의만을 고집하지 말고, 오월정신에 동참하는 많은 사람들과 연대하여 지역주의와 분단을 뛰어넘고 세계만방에 광주정신을 널리 알리자는 데에도 공감한다.

그러나 인권이라는 의제는 20년이라는 기나긴 투쟁과정에 비추어 보면 너무도 생뚱맞다. '민주의 성지' '오월에서 통일로'라는 지난 20년간의 구호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군부독재를 타파하고 분단을 극복하려는 민주화와 통일이라는 일관된 전국적 흐름이 갑자기 인권이라는 의제가 끼어들면서 '민주·인권·평화의 도시'라는 광주만의 구호로 바뀌었고, 지금 와서 아예 광주를 '인권의 도시'로 브랜드화하려고 하는 것은 주객이 전도되어도 한참을 벗어난 것이다.

지난 20년간의 투쟁이 잘못되었다는 말인가? 아니면 투쟁의 주체가 바뀐 것인가? 아니다.

5·18기념재단이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무장시민군인 구속자와 부상자, 그리고 그 유족들이 투쟁의 주체였기 때문에 항상 오월정신의 주체는 무장시민군과 그 유족이었다. 그러나 5·18기념재단이 만들어지고 모든 오월행사가 5·18기념재단으로 넘어가면서 문제는 불거지기 시작했다.

5·18기념재단이 5·18광주를 대표하게 된 것이다. 5·18기념재단이 5·18광주를 대표하게 되자, 오월항쟁 당시 총기회수를 주장했던 사람들이 이사장을 맡고, 학살현장을 뒤로 하고 혼자 살기 위해 재빨리 도망친 사람들이 또다시 재빨리 이사에 끼어들어 광주를 대표하는 권력까지 갖게 된 것이다.

5·18기념재단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감히 꿈꾸지도 못할, 정작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들이 권력화되면서 거침없는 행보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들의 최대흠결인 총기회수와 도피행각을 합리화하면서 감옥생활을 한 자신들도 오월항쟁의 주체임을 확인하는 도구로 인권을 등장시킨 게 아닌지 묻고 싶은 것이다.

2000년 광주인권상이 등장하면서 지난 20년간의, 아니 해방 후 한국전쟁과 4.19를 거치면서 면면히 이어져온 민주화와 통일이라는 일관된 전국적 흐름도 순간 그 맥이 끊기고 말았다.

해방 후 민주통일운동의 거대한 두 분수령을 오월항쟁과 유월항쟁으로 보았을 때, 오월항쟁이 없었다면 유월항쟁을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오월항쟁은 단연코 해방 후 이 땅의 민주통일운동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오월항쟁을 상징하는 광주인권상이 등장하면서 한국을 상징하는 민주통일운동은 사라지고 광주의 인권운동만 남게 되었다.

지난 20년의 투쟁이 잘못됐는가

그 동안 5·18의 전국화와 세계화를 위해서는 당사자주의를 배격하고 전국민이 함께 참여하고 세계만방에 오월을 알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정작 전국화를 한다면서 해방 후 일관된 전국적 흐름인 민주통일운동은 사라지고 인권운동만 남게 된 것이다. 나아가 세계만방에 오월항쟁을 알리자면서 한국은 사라지고 광주만 남아버린 것이다.

모든 상에는 역사가 있게 마련이다. 도대체 광주인권상에서 말하는 인권운동이 해방 후 우리 역사에서 투쟁의 주요 의제로 등장한 적이 있었던가? 역사도 출처도 불분명한 인권이라는 의제는 결코 광주를 대표할 수 없다. 따라서 광주인권상은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야 한다.

물론 그 동안 고질적으로 문제를 야기해왔던 당사자주의만을 고집해서는 안 될 것이다. 협소한 투쟁 주체들만이 아닌 모든 광주시민이 함께 하고, 나아가 지역주의와 분단을 넘어 세계만방에 광주정신을 널리 알려야 한다.

하지만 항쟁 당시의 처신마저 덮어두고 단지 오월당시 옥살이했다는 이유만으로 무장봉기의 주체를 대표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더욱이 오월항쟁 당시 수습대책위와 시민군은 총기회수와 결사항전으로 끝내 평행선을 긋다 막을 내렸고, 지금까지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적이 한번도 없었다.

5·18기념재단이 광주를 대표하는 권력을 가진 지금은 오월정신을 바로 세우고 계승하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이 문제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4·19동지회나 광주학생독립운동 단체처럼 투쟁의 주체를 올바로 세우고 그 정신을 기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5·18기념재단도 죽음을 불사하고 결사항전을 택했던 영령들과 무장시민군을 중심에 두고, 그 정신을 기리는 사업을 전개해야 함은 또한 너무나도 당연한 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