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항일세력의(독립군) 토벌 - 110여회 참가했다.

 

"박정희가 육사를 졸업하고 일본군장교로 임관된 다음 처음 배치된 곳은 일본의 마쓰야마(松山)  제14연대였다. 그러나 곧 만주국 보병 제8연대의 소대장으로 임명되어 목단강 아래 있는 영안으로 파견되었다. 이곳은 일찍이 노령 신한촌에 웅거하던 항일독립운동가들이 서진할 때의 요충으로서 한인 농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박정희는 얼마 안있어 이곳으로부터 화북지방의 열하성으로 이동배치되어 일본 북지나파견군의 열하보병 제8단에 배속되었다. 열하지구는 만주와 중국대륙을 잇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일본군에 대한 항일세력의 저항이 끊임없었던 곳이다. 항일세력의 중심은 중국공산당의 팔로군이었으나 당시 동북지구성과 화북일대에서 일본군에 항거한 세력은 이밖에도 여러갈래가 있었다.


국민당 정부의 국부군관 군벌군, 독립적인 항일유격군, 심지어는 만주일대의 비적들까지도 일본군과 싸웠다. 주력은 중국인이었으나 조선인의 항일조직도 만만치 않았다. 한인들은 임시정부의 광복군, 연안의 조선의용군 혹은 독립된 게릴라부대로서 때로는 단독으로 또 때로는 국부군이나 중공군과 함께 항일유격전을 벌였다. 조직의 구성과 이념은 달랐지만 당시 조선인 항일부대의 목표는 우선 한가지, 일본에 대한 무력항쟁과 조국의 광복이었다.
 
박정희가 일본군장교로서 싸운 항일세력이란 이런 것이었다. 식민지민족의 비극이기도 하겠지만 그가 속해 있던 일본군이 소탕의 대상으로 삼았던 항일세력 속에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이역에서 피흘린 동족의 청년들이 있었다. ...... 당시 일본군으로 끌려간 조선인 학병이나 징용군 가운데서는 일본군으로부터 탈주하여 항일군에 가담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이상우)
 
박정희 부대와 맞서 싸운 대표적 항일군사조직인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을 간단히 살펴보자. 1942. 7월에 중국의 화북지방(연안)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기위해 화북조선독립동맹(華北朝鮮獨立同盟)을 결성하고, 그 밑에 군사조직으로 조선의용군을 거느린다. 조선의용군이 속한 조선독립동맹은 건국강령으로 보통선거실시, 의무교육실시, 조선에 있는 일제의 대기업의 국영화와 토지의 분배실시 등를 내걸어, 임시정부(臨時政府)의 건국강령에 천명된 내용과도 별반 차이가 없던 항일조직이었다.
 
즉 조선의용군은 조선의 독립과 해방을 목표로 활동한 한인무장부대였던 것이다. 당시 조선의용군은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에 합류하지 않고, 연안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활동을 하며 8로군과 협동작전도 펼치고 화북, 만주지역에서 항일전투를 전개했다. 또한 8로군에도 한인무장단체나 독립투사들이 소속돼 있었다. 이들 독립투사들은 독자적 군대를 결성하기 힘들어 민족 독립을 위해 무기를 얻고자 8로군에 들어간 경우도 적지 않았다.
 
박정희가 "독립군을 110여회나 토벌했다"는 이야기의 시발점은 진보학자의 주장이 아닌 1960년대 박정희추종자가 쓴 박정희 전기다. 다만 이 책은 박정희의 친일전력을 덮기 위해 박정희의 일본군 복무경력을 반공투쟁으로 미화시켜 항일세력들을 공비들로 둔갑시켰다. 공비들로 매도된 그 분들이 일제와 맞서 싸운 항일운동가로 인정받게 됨에 따라 110여회의 토벌설은 오히려 박정희의 악행으로 부메랑이 돼 인터넷상에도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다시말해 110회 토벌설을 먼저 주장한 쪽은 아이러니하게도 박통교 친일수구꼴통들이었다. 왜 박정희는 자신의 추종자가 쓴 이 내용에 대해 침묵했으며, 왜 추종자들은 이제와 자신들이 주장하고 인정했던 110여회의 토벌사실을 좌파들의 박정희 죽이기라며 부정하는 건가?
 
만주8단에 같이 근무했던 선배와 동기들의 증언을 통해 박정희가 일선 소대장으로 근무하면서 독립군 토벌작전에 수차례 참가한 사실은 이미 확인되었다. 박정희가 110여회나 독립군 토벌에 적극 나섰다는 주장은 개인적 생각으론 과장됐다고 생각하지만, 간도특설대나 만주보병8단 출신들의 증언도 자신들의 죄를 축소하기 위해 박정희의 전력을 축소시켰을 가능성이 많아, 박정희가 겨우 수차례 토벌작전에 참가했다는 이들의 이야기또한 그 신빙성이 희박하다.
 
당시 박정희와 함께 우수생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진학한 중국인 우쉬에원 씨의 증언에 의하면 "나와 다른 2명의 동급생은 육사 졸업 후 항일 전선에 가담하기 위해 도망쳤지만 박정희는 만주 군관학교로 다시 돌아가 견습군관을 거친 뒤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고 했다.
 
또한 일본인인 다카야나기 도시오 일본 법정대 교수조차도 "당시 공비로 불리던 독립군 토벌이 군관학교의 역할"이라며 "황국군인으로 길러진 청년 장교들이 만주국의 통치수단이었으며 동시에 소련과의 전쟁준비에 이용됐다"고 했다.
 
어쨌든 박정희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군과 맞서 싸운 항일운동가들을 적으로 삼는 제국군인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 황국신민(皇國臣民)이란 사실엔 추호도 변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