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는 친일파가 맞다는데 난 이견이 읍음.

1. 안중근은 손가락을 잘라 태극기에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는 혈서를 쓰고 항일 독립군이 됐지만, 박정희는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保國 滅私奉公)"이란 혈서를 바친 덕택에 일제의 철저한 신원조회·사상검증에도 불구하고 1940.4.1일 만주신경군관학교에 입교해 꿈에도 그리던 일본군 장교가 된 것이다.
당시 동료교사였던 유증선이 "박선생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면 어떨까?"라며 제안하자 박정희는 그 자리에서 찬동하고 혈서를 썼다고 한다. 유증선은 만주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박정희 이야기가 실렸다고도 증언했다. 박정희추종자들이 주장하길, 유증선은 박정희를 음해하기 위해 만들어 낸 허구인물이라 한다. 하지만 유증선은 안동교육대 국문과 교수를 지냈고 박정희가 죽기 석 달 전 박정희로부터 청와대 초청까지 받았던 실존인물이다.
1962년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비서였던 이낙선 중령이 정리해둔 비망록에도 "원래 일본 육사는 연령초과였고 만주군관학교도 연령초과였으나 군인이 되고자 하는 일념에서 군관학교에 편지를 하였다. 그 편지가 만주신문에 났다. 이렇게 군관을 지원하는 애국 정신이 있다고…" 이러한 당시 혈서론의 근거를 뒷바침할 취재 내용이 들어있다.

이 내용들은 조갑제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도 나온다. 박정희 찬양이라면 진실과 상관없이 미쳐 날뛰는 조갑제조차 충성혈서(忠誠血書)의 존재를 인정하는 글을 쓴 것이다. 설마 박통교의 교주 조갑제가 박정희를 음해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겠는가?
'<박정희 친일행적 10가지>에 대한 명쾌한 반박'이라는 글을 보면, 혈서론의 출처인 만주일보는 1927~1934년까지 존재했다고 한다. 즉 1934년에 폐간되었으니 박정희가 입교한 1942년에는 만주일보가 없었다는 것이다(박정희는 1940년에 만주신경군관학교 입교). 그 근거로 서울대 소장목록을 들었다. 그러나 서울대 소장목록은 말 그대로 1927~1934년 사이에 발행된 만주일보를 서울대가 소장하고 있다는 얘기지 실재로 만주일보가 존재했던 기간은 아니다.

만주일보(滿洲日報)는 1919년 7월 21일에 만주 봉천에서 친일 언론인인 선우일(鮮于日)이 창간한 친일지로 폐간과 재창간을 반복했었는데, 신경군관학교 2기생 예과 졸업식의 박정희 사진에서 보듯 1942년에도 존재했던 신문이다. 만주일보의 <창간-폐간연도>도 모르고 박정희가 입교한 해도 모르면서 거짓글을 써댄 글쓴이와 '명쾌한 반박'이라며 입이 쩌억 벌어진 수만명의 꼴통 박사모 회원들... 생각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