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는 누굴 쏘았어야 했나?

한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 나라를 착취하기 위해 철도, 도로를 깔고 전기를 가설하고 수도를 공급해야 한다. 또 노동력 착취를 위해 식민지 백성들 교육을 시켜야 하고, 전염병을 막기 위해 병원도 짓고, 학교도 지어야 한다. 또 잘못하다가 폭동이라도 일어나면 군대 유지에 막대한 비용이 든다. 식민지는 공짜로 뜯어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막대한 투자를 먼저 해야 착취가 가능한 제도다. 그 당시 일본은 조선에 이처럼 막대한 투자를 할 여력이 부족했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110주년을 맞아 광주 북구 중외공원에 세워진 안중근 의사 숭모비(사진 연합뉴스).
때문에 이토 히로부미를 필두로 한 문관들은 현실론을 내세웠다. 한국의 외교권·군사권 등은 일본이 장악하고 있으니 무리수를 두어가면서 병합을 서두를 이유가 없다. 한국 황실의 적당한 인물을 선정하여 그들에게 자치를 맡기고, 여유를 가지고 병합을 추진하자는 온건론 내지 신중론 입장이었다.

반면에 군부는 하루라도 빨리 한국을 병합하여 대륙으로의 진출을 주장했다. 국수주의자들과 군부는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유약한 인물”이라고 공격하여 1909년 그를 조선통감에서 쫓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1909년 4월, 가츠라 다로(桂太郞) 총리,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가 이토 히로부미를 닦달하여 한국 병합에 반대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못을 박았다.

다시 말하면, 이토는 대한제국 병합에 적극적이지도, 능동적이지도 않았다. 그도 대한제국의 병합은 필요하다고 보았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당장 병합하는 것은 일본의 재정상황이나 국제정세를 감안할 때 무리라고 보았다. 때문에 일정 기간 한국인들에게 자치를 맡기고, 때가 무르익을 때까지 병합을 늦추자는 의견이었다.

이런 인물이 조선통감으로 버티고 있었기에 병탄이 계속 늦어졌다. 그 결과 이토 히로부미는 국수주의자들과 강경론을 펴는 군부에 미운털이 박혔고, 조선통감에서 쫓겨나면서 정치적 리더십을 완전 상실했다. 한일 병합을 신중하게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한 죄로 그는 재기불능 상태에 빠졌다.

그렇다면 안중근 의사는 누구를 쏘았어야 하나? 이왕 의거를 감행할 바에야 온건론자, 혹은 자치론자 이토 히로부미가 아니라 야마가타 아리토모, 데라우치, 가츠라 등 병합 적극론자를 격살했어야 이론상 맞는 것 아닌가? 

엉뚱한 사람을 처단함으로써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이토는 당시 조선통감에서 쫓겨나 정치적 식물인간 상태였다. 이처럼 인기가 바닥이었던 인물이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총을 맞고 죽음으로써 하루아침에 영웅이 되었다. 이토의 죽마고우이자 정적(政敵)이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이토의 죽음 소식을 듣자 “아, 저 친구는 죽음마저 하늘이 도와주는 구나” 하고 한탄했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진정으로 대한제국의 독립과 안전보장에 도움을 주었는가? 혹시라도 도움은커녕 오히려 병합을 앞당기는 역할을 한 것은 아닌가? 이제 우리는 반일 종족주의의 족쇄에서 벗어나 현실의 역사를 직시할 때가 되었다. 안중근 의사의 공적을 깎아내리자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훌륭한 의거라도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공과를 따져보자는 뜻이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도 감성적·감정적 차원이 아니라, 냉정하고 객관적인 분석을 통해 실체를 보다 폭넓게 규명해야 할 시점에 왔다고 생각한다.

출처 : 펜앤드마이크(http://www.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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