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직후 귀국하여 오산학교·휘문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1920년대 초반에는 한때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냈다.
시대일보사 사장으로 재직 중인 1927년에 민족 단일 조직인 신간회 의 창립에 관여하여 그 부회장으로 선임되면서 사회운동에 적극 투신하였다.
1930년 신간회 주최 제1차 민중대회사건의 주모자로 잡혀 옥고를 치렀다. 1945년 광복 직후에는 좌익운동에 가담하고,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이 되기도 하였으나,
곧 바로 월북하여 북한 공산당정권 수립을 도우면서 부수상 등 요직을 거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의 활동을 보면..
그는 일제강점기 최대의 장편소설의 하나로 손꼽히는 『임꺽정』을 발표함으로써 문학사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작품은 1928년 『조선일보』에 첫 연재를 시작한 뒤 세 차례에 걸쳐 중단되었다가, 광복 직후 미완의 상태로 전 10권이 간행되었다.
조선 중기에 지방의 도둑으로 실록에 그 행적이 단편적으로 기술되기도 한 임꺽정의 이야기를 방대하게 그려내었다.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이 밝힌 바 있듯이, 반봉건적인 천민계층의 인물을 내세워 조선시대 서민들의 생활양식을 총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작품 속에서 귀족계층의 계급적 우월성이 배격되고 오히려 천민의 활약을 당위론적인 측면에서 그려 보이고 있는 것은 작가가 지니고 있는 계급적 의식과 세계관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더구나, 이 작품이 식민지 현실의 모순 그 자체보다도 봉건적인 체제모순에 더욱 비판적인 점은 특기할 만하다. 이 소설에서 다양한 삽화를 처리하는 서사적 기법과 풍부한 토속어의 구사력은 조선시대 사회상과 풍속을 재현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홍명희는 일제시대 때 이광수, 최남선등과 함께 3대 천재라고 불렸다.
그의 문학적 태도를 확인해볼 수 있는 글로는 「신흥문예의 운동」(문예운동, 1926.1.)이 대표적인데, 이 글에서 계급문학운동의 의미와 그 가능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밖에도 「조선문학원류약론」(청구학총, 1931.2.)·「이조문학논의」(삼천리문학, 1938.1.) 등의 고전문학 관계 논문이 있다.
그리고 「대 톨스토이의 인물과 작품」(조선일보, 1935.11.23.∼12.4.)·「문학청년들의 갈 길」(조광, 1937.1.)·「학창산화」(박문, 1938.12.) 등의 글이 있다.
저서로는 수필집 『학창산화』(조선도서, 1926)와 장편소설 「임꺽정」(을유문화사, 1948)이 있다.
무엇보다 홍명희는 북한의 부수상 이다.
광복 후 월북하여 북한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북한 내각 부수상, 북한 최초 ioc 위원을 지냈다.
또한 1948,9년에 스탈린과 회담을 위해서 소련으로 김일성, 박헌영등과 함께 가는 자료등이 많이 남아있다.
다시 돌아가서 김소월은 14살때 3살위인 오순이 라는 누나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이루어지진 않았다.
할아버지가 택한 홍명희의 큰 딸 홍단실과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오순이도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되는데 남편이 심한 의처증이 있어서 결국 결혼 1년 후 오순이는 매 맞아 죽게 된다.
《초혼》시 가 오순이를 생각하며 썼다는 설 이 있다.
한편 소월의 부인 인 홍단실의 여동생 홍영숙,그러니깐 홍명희의 막내딸 홍영숙이 1950년 김일성과 결혼 하게된다. 1년전인 1949년에 김일성의 부인인 김정숙이 출산하다 사망하게 된다.
그래서 1년 후 1950년 홍영숙과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홍영희는 심장이 안좋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1년도 못되서 사망하게 된다.
그래서 김일성은 다시 김성애와 결혼하게 된다.
그러하므로 김일성은 홍명희의 사위가된다.
그러므로 ( 김소월과 김일성은 동서지간이 ) 되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