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하면 보통 김구만 언급되는 경향이 있다. 


30~40년대로 말하면 김구가 중심인물이지만 20년대로 


좁혀보면 여러명이 있다고 할수 있다.


20년대 임정(임시정부의 줄임말)의 가장 중요했던 인물 중 


하나가 4대 국무령 홍진이다. 가히 밑줄그을만큼 대단한 


인물이었다.  


홍진이 국무령이 된 26년의 임정의 상태는 막장이었다. 


이승만의 비협조로 미국의 독립세가 오지 않아 재정이 


고갈된 상황이었다. 거기다 의열단은 말안듣고 개겼고 


공산당과 민족계열은 서로 견제와 당파싸움에 


여념 없었다. 


 홍진의 취임일성은 인상적이었다. 


" 내 아랫다리들은 집합해서 대가리박아!"


당파싸움하던 제 정파들이 귀를 쫑끗했다고 한다. 


 취임이성은 더욱 인상적이었다. 


" 독립하기까지 모든 정파는 1개의 당으로 뭉친다. 실시!"


 

세계 각지의 한민족 역량을 하나의 당으로 통합하여 일제와 


대결한다는 거창한 계획이었다. 민족 유일당 운동의 


시작이라고 할수 있다. 쉽게 말하면 중국의 국공합작을 따라한 


거라고 할수 있다.  


홍진은 나이도 많고 똑똑해서 권위가 있었다고 한다. 홍진의 


언령에 제 정파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반도에서 합작이 


이루어져 신간회가 만들어졌고 만주에서는 국민부가 


만들어지게 됐다. 중국대륙에서는 민족유일독립당 촉성회가 


각지에서 만들어졌서 진짜 먼가 되나 했을정도 였다.  


중국에 중요한 독립거점은 광주와 상해였다. 광주에는 


국민당정부와 황포군사학교가 있었고 상해에는 임정이 있었다. 


광주촉성회의 집행위원 중에 하나가 바로 "최용건"이다. . 


대륙에서 유일당운동이 어느정도 진행되었지만 무장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만주지역이 지지부진했다. 홍진은 국무령을 


사퇴하고 직접 만주에 가서 유일당 운동을 진행할 


결심을 한다.


홍진은 민족계열이기 때문에 만주에서 유일당운동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공산당측 대표도 같이 가야 했다. 


이 와중에 첫번째 공산대표가 변절하여 일제에 투항하게 


되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다음 순위 공산대표로 최용건이 


선택되게 된다. 중국국민당의 불행이고 중국공산당의 


행복이라 할수 있는 사건이었다.  


홍진과 최용건은 28년 1월 만주로 이동하게 된다. 


이 부분의 사실여부는 확실치 않으니까 나중에 


사학계에서 정리가 필요하다. 


제목이 과한거 같지만 그리 과한거는 아니다. 임정에서 


그만큼 비중있는 인물이었고. 임정의 군사력 즉 


황포출신들을 한 손에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홍진이 항일의 민족대표로 만주에 간 인물이라 하면 


항일의 공산대표 최용건이었다고 해도 틀린말은 아니게 된다. 


단지 역사에서 숨어있고 워낙 성격이 겸손한 인물이라 


잘 드러나지 않는거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