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건은 독립운동가들 중에서는 나름 완벽한 인생이었다. 


잘못도 적었고 흠도 적은 편이었다. 하지만 딱 한번 실수를 


하는데 그게 바로 광주꼬뮨 참가다.



최용건에게 천추의 한이 되겠지만. 최용건 개인에게만이 


아니라 독립운동사를 뿌리까지 뒤흔든 사건이다. 


광주꼬뮨 때문에 안그래도 힘들었던 임정(임시정부의줄임말)은 


생존이 힘든 상황까지 몰리게 된다. 


 

광주꼬뮨을 알려면 1920년대 중국의 정치상황을 알아야 


이해가 될것이다. 


중국 제일 인물인 원세계의 죽음으로 대륙은 조각조각 


갈라지게 된다. 북경정부와 광동정부를 비롯해 수십개의 


군벌들이 지역을 할거하고 왕 노릇을 했다. 손문의 광동정부는 


대의는 있었지만 힘은 미약했다. 그래서 국민당과 공산당이 


손을 잡게 된다. 교과서에서는 1차 국공합작이라 부른다.


손문 때는 그럭저럭 지냈는데 손문이 죽고 장개석이 총통의 


자리를 이어받으면서 갈등이 불거진다. 장개석은 반공주의자였다. 


중국통일을 위한 북벌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자 장개석은 총구를 


공산당에게 돌려. 1927년초 상해학살을 일으키게 된다.   



장개석 나쁜 놈이라고 욕하는 사람이 있지만 딱히 장개석이 


잘못했다고는 볼수 없다. 국민당과 공산당은 이월동주였으므로. 


당시 공산당들도 주은래를 중심으로 쿠테타하려고 힘을 


키우고 있었다.


장개석은 선빵 날린 죄밖에 없었던 거다. 어차피 내란은 


일어날 일이었다. 하지만 장개석의 선빵은 실수였다. 명분을 


공산당이 가져갔고 민중이 공산당에게 동정적이 되었다. 


인생사가 다 그렇지만 실리만큼 명분이 중요한 법이다. 


장개석의 선빵에 빡친 주은래는 광동 옆에 있는 무창에서 


힘을 모아 봉기를 일으키게 된다. 무창에서 집결하여 


광동으로 쳐들어가는 작전이었다. 후일 10대 중공원수 중에 


6명이 참여할만큼 거창한 계획이었지만 무창봉기는 제대로된 


전투한번 못하고 실패하게 된다. 



상층부만 빨갱이일뿐 무창봉기군의 대다수 병사들은 


국민당군이었다.


광동으로 진군하면서 봉기가 빨갱이들의 농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장개석한테 실망하긴 했지만 빨갱이 이념에 


동조하고 봉기한 것은 아니었다. 광동까지 가면서 하나둘씩 


사라져서 끝까지 가지도 못하고 봉기는 실패하고 만다. 


무창봉기에는 조선인들도 참가했다. 김원봉이 의열단을 


이끌고 참가했고 팽덕회 부하 무정도 참가했다. 표면적으로 


국민당의 정의를 세우자고 일어섰기 때문에 빨갱이봉기로 


치기도 하고 안치기도 한다. 어쨌든 조선독립운동사에도 


별 피해도 없었다. 


본격적인 빨갱이 봉기는 광주봉기 즉 광주꼬뮨이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와심상담한 주은래가 나와바리로 만든 


황포군사학교를 중심으로 국민당 본거지인 광주를 뒤집을 


계획을 세우게 된다. 


광주봉기는 독립운동사의 재앙이었다. 군사학교 생도 150명에 


일반인까지하면 200명이 참여하여 대다수가 죽게된다. 미래의 


조선인 장교만 150명 넘게 죽었으니 항일무장투쟁의 꿈이 날라가 


버린거다.


더 안타까운 것은 조선생도들이 다 빨갱이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먼저 장개석을 타도하면 조선독립을 위해 일제에 대항하여 같이 


싸우겠다고 약속을 했던 거다.


대다수 생도들은 항일한다는 생각으로 죽기까지 싸운거였다. 


최용건이 지휘하는 조선생도들이 퇴로를 사수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물러서는 사람도 항복하는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독립운동의 꿈을 앉고 중국까지 가서 빨갱이의 구라에 속아 


항일도 아닌 내전에 이용당해 죽었으니 눈을 감을수 있었을까? 


광주봉기 실패는 오성륜하고 김산 같은 일반인의 책임도 분명히 있다.


오성륜이 이끈 일반인들이 의열단 경력을 내세워 사단장 저격의 


임무를 맞게되는데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거였다. 낭만파 


혁명가들은 대사에 참가시키는게 아닌데 엽검영이 실수했던 


거라고 할까..


조선인 일반인들은 축제라고 생각한 사람도 많았다. 


김산에 따르면 광주꼬뮨 3일 내내 밤마다 술 찾아 먹기 


바빳다고 한다. 군인의 신분이었던 조선인 생도하고 일반인은 


정신상태부터 틀린거였다.


  

최용건에게 천추의 한이자 인생 최대의 오점이라고 할수 있는 


광주꼬뮨사건은 그러나 역설적으로 최용건의 이름을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된다.


광주꼬뮨 사건 때문에 중공 지도부까지 최용건하면 한발 


양보할 정도 였다. 그러나 또 광주의 모든 조선인이 참가했으니 


딱히 최용건만의 잘못이라 할수는 없다. 혼자만 빠지면 


왕따되자나? 하지만 중국빨갱이의 후퇴를 위해 소중한 


조선생도를 희생시킨 것은 변명할수 없는 잘못이라고 


할수 있다. 


광주꼬뮨의 트라우마 때문인지 모르지만 이후 최용건은 


부처와 같은 성격을 갖게 된다. 공자와 비슷하다는 주은래와 


맞먹을 정도라고 할까?


평생을 속죄하며 양보하고 살아야 할 운명을 갖게 된 


거라고 할까..


 

 이상.. ?